-

-자료출처-나무위키



에밀레종


신라 때 만들어진 크고 아름다운 종이다.


국보 29호로 1962년 12월 20일에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 남은 신라 범종 중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 m, 지름 2.27 m, 두께 11∼25 cm이다.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20세기 전까지는 신라대에 만들어진 현 한국 최대의 종. 이라는 타이틀이 있었으나 현재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종은 2008년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평화의 댐에 위치한 세계평화의종공원의 세계평화의 종(10,000관 (37.5톤) 높이 4.67 m 지름 2.76 m)이다.[1] 하지만 여전히 성덕대왕신종이 한국을 대표하는 범종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신라 전제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아버지 성덕왕의 공을 기리고자(그래서 성덕'대'왕) 경덕왕이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성되기 이전에 경덕왕은 죽었고 그 아들,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이 재위하던 771년에야 주조가 끝난다(즉, 그때까지 계속 시도하고 있었다는 것). 이러한 사실은 성덕대왕신종 표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에밀레종 전설


봉덕사에 달아 봉덕사 종이라고도 하고 '에밀레' 하고 울린다 해서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에밀레종에 대한 전설은 매우 유명하다.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종을 만들기 위한 돈을 시주받았는데, 시주하러 다니던 스님이 들른 어떤 한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 집에서는 '마음 같아서는 시주하고 싶지만 있는 건 갓난아기뿐이네요'라고 아기라도 시주받아 가겠냐는 투로 말했다.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떠나 열심히 시주를 받아 종 주조에 보탰다.

.

그런데 종이 도무지 완성되질 않아 점을 쳐 보니 '받아올 시주를 받아오지 않았다'라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저 아기를 시주하겠다던 집밖에 안남기에 그 아이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2] 그래서 스님은 아이를 시주한다던 그 집을 찾아가 결국 아이를 강제로 데려왔고, 아이를 쇳물에 던진 뒤 종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이후 종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소리처럼 에밀레('어미의 탓이다'라고 원망한다는 해석도 있다.)하고 울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말실수로 인해 아이가 시주로 바쳐졌다는 이 이야기가 제일 잘 알려져 있으며 다른 내용의 전설도 존재한다.


봉덕사에서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일전(一典)이라는 이름의 종장이 이 때문에 주위의 비난을 엄청 받았고 고심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일전에게는 과부의 몸으로 그 집에 얹혀살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가 오빠의 실패를 자신의 실덕으로 여겨서 고뇌 끝에 자신의 아이를 바쳐서 종의 제조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일전에게 이를 알린다. 일전은 처음에는 이를 망설였지만 결국 부처의 뜻으로 여겨 그 청을 받아들인다. 결국 아이는 도가니에 던져지고 종이 완성되었고, 종소리는 아이가 어미를 원망하는 '에밀레'로 들린다고 한다. (최상수, <경주의 고적전설>에서 발췌)



진실


이 이야기에 대한 기록은 놀랍게도 20세기가 되어서야 처음 등장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성덕대왕신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아동문학가 렴근수의 단편동화 《어밀네 종》이 최초로 나타난 자료이다. 이후 친일 문학가 함세덕에 의해 공출과 징병에 빗대 이를 정당화 하는 희곡 <어밀레 종>으로 둔갑한다. 그렇기에 에밀레종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며, 에밀레종이라는 이름도 이 때 처음 생긴 것이라는 설이 있다.


여기서 종을 주조할 당시 아이를 넣었다는 인신 공양 설화는 일제에 의해 이용되기 전부터 간장과 막야부터 시작하여 중국에서 이미 있었다. 아이를 넣었다는 설화 자체는 구전이라 해도 일본이 인위로 만든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설화가 보신각종에서 성덕대왕신종으로 넘어간 것일 뿐이란 주장도 나온다. 선교사 알렌과 헐버트 등은 1900년을 전후해 에밀레가 보신각 종이라고 기록한 것이 대표적.


1927년 성덕대왕신종에 대해서도 유아공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글이 동아일보에 실렸음이 밝혀지면서 에밀레종이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또한 조선 중기 평양 연광정 옆의 평양 종에도 비슷한 설화가 있음을 해당 기사에서 전하고 있다#. 고로 더 자세한 고증이 요구된다. 


종이 운다는 이야기는 오호십육국시대 전량 때 세워진 중국 감숙성 무위(武威)시 대운사(大雲寺)에 있는 종이 대표적. 여기는 "낭아娘呀, 낭娘"(여자 혹은 어머니)또는 "응당應當, 응당應當" 이라고 운다고 한다(황인덕의 연구). 당나라~오대십국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추정되므로 이런 이야기가 번역되어 같은 시기 한반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이 전설이 혜공왕대의 상황에 대한 은유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린 아들을 허수아비왕으로 세우고 국정을 농단하던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과 혜공왕대의 실권자이자 혜공왕의 외사촌이기도 한 김양상을 비꼬기 위해서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것. 이 견해에 따르면 어떤 유형의 전설에서든 아이의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혜공왕의 아버지인 죽은 경덕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성덕대왕 신종의 완성된 때가 혜공왕대임을 감안하면 일리 있는 해석이긴 하지만 앞서 보듯 이 설화 자체가 논란이 있어서(...) 


당연히 진짜로 아이가 들어간 게 아니다. 성분분석에 따르면 인간을 넣었을 경우 당연히 있어야 할 성분(뼈의 칼슘이라든가, 인이라든가)이 없으므로 그냥 전설일 뿐이라고. 애초에 주조 과정에서 종의 균열을 막기 위해서는 신속한 공정이 요구되기 때문에 신종을 만들 때는 소형 도가니들로부터 동시에 주물을 붓는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아이를 넣으려면 아이를 균등하게 갈아(…) 도가니별로 넣어줘야 하는데 잔혹성은 둘째치고서라도 제대로 된 종이 나올 리가 없다. 다만 당시 애를 갈아넣었다고 할 만큼 고혈을 짜서 만들었다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또한 그런게 사실이라면 왜 기록이 없을까? 물론 기록이 없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 쳐도 저자가 김부식인 삼국사기에도 없다는 건 진실이 아니라면 없다는 게 이상하다. 게다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를 믿는 신라에서 종을 만든다고 아이를 잡아와 집어넣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그리고 정말 종을 만든는데 아이가 필요하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종은 다 아이가 집어넣어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특징


현 소재지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번지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


신라의 사찰인 봉덕사에 있었다가, 봉덕사가 폐찰되자 1460년 영묘사(靈妙寺)에 옮겨서 걸었다. 이후 1507년에 경주성 남문 밖에 걸어서 성문의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성덕대왕신종의 아래에는 땅을 파놓은 울림통이 있는데, 종 위의 음관과 함께 한국 종의 고유한 특징이다. 울림통은 종이 울릴 때 나오는 간섭파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지금 설치된 울림통은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종의 진동수와 약 3Hz정도 오차가 있다고 한다. 크기를 키워야 된다는 이야긴데, 연구된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울릴 일이 없다 보니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종 위의 음관은 찢는 듯한 고주파음을 재빨리 밖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성덕대왕신종은 종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있다.[3] 1992년 제야(除夜)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했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타종했다. 그 뒤 2001년 10월 9일, 2002년과 2003년 개천절(10월 3일)에 타종행사를 열었으나, 이후로는 보존에 문제를 일으키는 금속 스트레스 누적을 억제하기 위해 이를 금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종을 살짝이나마 쳐보는 일이 빈번해 당목도 떼서 바닥에 둔 상태다. 주기적으로 쳐 주는 것과 안 치는 것 어느 쪽이 보존에 유리한지는 전문가만이 알 것이다. 다만 한국의 보존기술은 반쯤 망가진 종을 완전복원해 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정도라는 사실은 알아두자. 아침저녁으로 종치면서도 천년이 넘도록 멀쩡했건만 나름대로 보존을 한답시고 최첨단 기술로 개발된 보존액을 발랐다가 되레 부식해서 이젠 치지도 못한다는 말도 있으나 녹슬지도 않은 쇠에 보존액을 굳이 바를 리가 없으므로 이건 그냥 진짜 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데 대한 악담이나 억측이다. 


예전처럼 소리가 잘 안 난다는 지적에 대해, 음향 전문가 중 한 사람은 종이 아니라 종을 타격하는 당목이 너무 오래 되어서(!) 종을 제대로 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종 표면의 명문(銘文)이나 그림 등을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 2층 서화 코너에 가자, 탁본이 전시돼 있다.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