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마광수 교수 사망소식이 전해져 충격을 주고 있다. 소설가 마광수 교수는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소설가 마광수 교수에 사망 소식과 소설가 마광수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소설가 마광수 사망


마광수 교수가 사망했습니다. 소설 `즐거운 사라`로 유명한 소설가 마광수 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가 5일 숨진 것. 향년 66세 입니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낮 12시51분께 마광수 전 교수가 자신의 자택인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숨져 있는 것을 가족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현장에서는 유산을 자신의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넘긴다는 내용과 시신 처리를 그 가족에게 맡긴다는 내용을 담은 유서가 발견됐습니다. 다만 이 유서를 숨지기 직전 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은 전했습니다.


경찰은 마광수 전 교수가 목을 맨 채 발견된 점으로 미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자세한 경위를 조사 중입니다. 연세대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마광수 전 교수는 시인 윤동주 관련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따며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989년 펴낸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대중적으로도 알려졌으며, 1992년에는 발간한 `즐거운 사라`가 외설 논란을 빚어 구속돼 표현의 자유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는 연세대에서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다 지난해 8월 정년퇴임했으나 해직 경력 때문에 명예교수 직함을 달지 못했습니다. 마광수 전 교수는 등단 40년을 맞은 올해 초에는 `광마집`(1980)부터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2012)까지 시집 여섯 권에서 고른 작품들과 새로 쓴 10여 편을 합해 119편을 묶은 시선집 `마광수 시선`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소설가 마광수씨는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수필집으로 한국사회에 파문을 던졌습니다. 당시 연세대 국문과 교수였습니다. “솔직하게 본능을 드러낸 야한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강의 중 학생들에게 “너희 섹스 해봤어? 사랑하니까 섹스 하는 거야. 섹스 해봐야 사랑을 알아” 등의 말을 거침없이 했습니다. 그의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마광수의 성(性)담론은 수필을 넘어 문학의 영역으로 확장됐습니다. 대표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에 이어 1991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발표했습니다. 이 소설은 출판되자마자 8만부가 팔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언론과 문학계에서 음란소설로 규정하면서 결국 그는 검찰에 의해 ‘음란문서유포죄’로 전격 구속됐습니다.


전례를 찾기 힘든 필화사건으로 그는 연세대에서 면직조치까지 당했습니다. 구속과 면직 등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문학은 상상력의 모험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입니다. 문학은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창조적 불복종이요, 창조적 반항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야한 작가는 문학계의 외로운 ‘왕따’가 됐습니다. 일각에서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로맨티스트’라고 그를 표현했고, ‘예술과 외설의 경계인’이란 말도 나왔습니다.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난 마광수는 종군기자였던 아버지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나왔고 ‘윤동주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5년 25세에 대학 강의를 시작해 28세에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낸 후 1984년부터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92년 10월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으로 전격 구속돼 두 달간 수감생활을 한 뒤 95년 최종심에서 유죄가 확정됐습니다. 연세대에서 면직됐다가 98년 복직했습니다. 이후에도 2000년 재임용 탈락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억척스럽게 그를 키워 교수로 만든 90세 노모를 줄곧 모시고 살았습니다.



1977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그는 시, 소설, 에세이, 평론 등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40여권의 저서를 쏟아냈습니다. 다음과 같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문학이론서= ‘윤동주 연구’ ‘심리주의 비평의 이해’ ‘마광수 문학론집’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문학과 성’ ‘삐딱하게 보기’ ‘연극과 놀이정신’ 



시집= ‘광마집(狂馬集)’ ‘귀골(貴骨)’ ‘가자 장미여관으로’ ‘야하디 얄라숑’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일평생 연애주의’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 ‘천국보다 지옥’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사랑받지 못하여’ ‘열려라 참깨’ ‘자유에의 용기’ ‘마광쉬즘’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 ‘더럽게 사랑하자’ ‘마광수의 뇌구조’ ‘나의 이력서’ ‘스물 즈음’



소설= ‘권태’ ‘광마일기’ ‘즐거운 사라’ ‘자궁 속으로’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광마잡담’ ‘로라’ ‘귀족’ ‘발랄한 라라’ ‘사랑의 학교’ ‘돌아온 사라’ ‘미친 말의 수기’ ‘세월과 강물’ ‘2013 즐거운 사라’ ‘아라베스크’ ‘인생은 즐거워’ ‘나는 너야’ ‘사랑이라는 환상’ 


문화비평집=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사라를 위한 변명’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육체의 민주화 선언’ ‘마광수의 유쾌한 소설 읽기’ ‘생각’ 



전시회= ‘마광수·이목일·이외수·이두식 4인의 에로틱 아트전’ ‘색(色)을 밝히다 전’ ‘꿈꾸는 삼총사전: 마광수·한대수·변우식’ 등 



그의 긴 약력은 마광수의 글이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모았는가를 보여줍니다. ‘구속’ ‘수감’ ‘항소심’ ‘해직’ ‘복직’ 등의 단어가 등장하는 이력은 민주화 운동가의 그것처럼 극적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무슨 운동가’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하고 싶은 말, 옳다고 생각한 말을 했을 뿐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은 처벌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운동가라기보다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파장을 몰고다닌 것은 그의 생각이 갖고 있는 ‘솔직함’ 때문이었습니다. 과감한 발언은 대중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됐고, 또 지탄의 시선을 불러 모았다. 그는 소설을 쓸 때 문장에 가장 신경을 쓴다고 토로했습니다. 가장 친근감 있고 가벼운 문장이 되도록 애썼다. 또 “작가는 ‘상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소설가 마광수씨는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임하던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수필집으로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또 강의 중 학생들에게 “너희 섹스 해봤어? 사랑하니까 섹스 하는 거야. 섹스 해봐야 사랑을 알아” 등의 말을 거침없이 했습니다. 그의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마광수의 성(性)담론은 수필을 넘어 문학의 영역으로 확장됐습니다. 대표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에 이어 1991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발표했습니다. 이 소설은 출판되자마자 8만부가 팔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언론과 문학계에서 음란소설로 규정하면서 결국 그는 검찰에 의해 ‘음란문서유포죄’로 전격 구속됐습니다. 



그는 연세대에서 면직조치까지 당했고 문학계의 외로운 ‘왕따’가 됐습니다. 일각에서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로맨티스트’라고 그를 표현했고, ‘예술과 외설의 경계인’이란 말도 나왔습니다.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난 마광수는 종군기자였던 아버지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나왔고 ‘윤동주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5년 25세에 대학 강의를 시작해 28세에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낸 후 1984년부터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92년 10월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으로 전격 구속돼 두 달간 수감생활을 한 뒤 95년 최종심에서 유죄가 확정됐습니다. 연세대에서 면직됐다가 98년 복직했습니다. 이후에도 2000년 재임용 탈락 등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억척스럽게 그를 키워 교수로 만든 90세 노모를 줄곧 모시고 살았습니다. 


‘야한 소설’의 대명사 마광수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5일 서울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향년 66세 입니다.



촉망받는 시인이자 학자였던 마광수 전 교수는 1991년 성애소설 ‘즐거운 사라’ 출간을 둘러싼 논란으로 굴곡진 삶을 살았습니다. 시중에 풀렸던 책은 보름 만에 모두 수거됐습니다.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여대생 제자와 성관계를 갖는 대학교수가 나오는 ‘즐거운 사라’에 대해 판매금지 처분을 내린 것 입니다.  


마광수 전 교수는 이듬해 8월 우여곡절 끝에 개정판을 냈습니다. 하지만 파장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는 2개월 후 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검찰에 잡혀갔습니다.외설적이라는 게 이유. 그리고 구속됐습니다. 두 달 만에 풀려난 그는 3년간의 법정 공방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 돼 학교에서 해고됐습니다.

 


1998년 국민의정부의 사면복권으로 복직했으나 2000년 재임용에 탈락하는 등 해직과 복직이 반복되는 고난이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광수 전 교수는 지독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마광수 전 교수는 2015년 3월 함께 살던 모친을 여의었고 지난해 학교에서도 정년퇴직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는 두 축을 잃은 것입니다.


경찰은 마광수 전 교수가 목을 맨 채 숨진 점을 미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자세한 경위를 조사 중입니다. 현장에서는 자신의 유산을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넘긴다는 내용과 시신 처리를 그 가족에게 맡긴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고 경찰은 전했습니다.



프로필


출생 1951년 04월 14일, 서울

사망 2017년 09월

직업 작가, 전직 대학교수

성별 남성

데뷔 1989년 장편소설 '권태'

학력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경력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정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홍익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조교수



1951년 4월 14일 서울 출생으로 1.4 후퇴 중에 태어나 유복자로 자랐으며 2017년 9월 5일,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66세 입니다.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국문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입학부터 수석 입학에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으며 학부과정을 올 A로 졸업했다고 합니다.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26세에 문단에 데뷔했으며, 홍익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를 거쳐 1983년부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인문학부 국어국문학과 교수(당시 32세)로 재직하다 2016년 8월 정년 퇴임했습니다. 



원래는 1977년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한 시인입니다. 1989년 장편소설 <권태>로 소설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이후 <즐거운 사라>, <자궁 속으로>, <귀족>, <불안> <발랄한 라라>, <사랑의 학교> 등의 소설집과, <가자 장미여관으로>, <야하디 얄라숑>, 육필시집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등의 시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등의 수필집을 집필하였습니다. 1989년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영화화하려고 했고, 감독으로도 결정되었으나, 제작사는 중간에 감독을 교체하고, 마 교수는 여기에 비난 기자회견을 한 바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마광수의 연기지도가 너무 야해서 당시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체했다고 합니다.



2016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강의를 앞으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아쉬운 일입니다. 그야말로 쓸쓸하기 헤어진 남녀와 다름없는 말년을 보내던 중, 2017년 9월 5일 생을 마감하기에 이릅니다. 작가로서는 굴곡이 많았지만 문학 연구가로선 커다란 업적을 남겼습니다. 바로 윤동주의 재발견. 윤동주의 시는 1984년 마광수가 제출한 박사논문으로 학계에서부터 화두에 오르고 여러 매체에 소개되면서 인지도가 급상승했습니다. 마광수가 쓴 윤동주에 대한 논문은 완성도가 매우 높아서 마광수 이후에 한동안 윤동주 연구자가 필요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현재 교과서에서 실린 윤동주 작품 해설은 마광수의 연구내용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정서인 '부끄러움'도 마광수의 발견입니다. 이는 마 교수 본인의 가장 큰 프라이드 중 하나입니다. 윤동주의 시가 수능 국어 영역에 가장 많이 출제되는 현대시이므로 사실상 대한민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은 마 교수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계에 만연한 지적허영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짜 좋은 글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는 게 마광수의 작문철학으로 그는 가독성을 매우 중시하여 복잡한 문장구조와 어려운 어휘들을 피해 글을 씁니다. 때문에 글이 쉽고 전달력이 매우 높다. 즉 그의 글에는 문학적 허세가 없고 글의 전달력이 높아, 읽는 데 피곤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오히려 "쉽게 쓰는 게 어렵다"라고 말할 정도로 글의 전달력, 가독성에 힘을 쏟는 스타일이다. 작가로서 대단한 장점입니다.



그는 허례허식과 허세를 비판하며, '성(性)'에 솔직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는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데에 누구보다도 앞장섭니다. 그 때문인지 1990년대에는 불경한 음란문학이라며 지탄받았지만, 현재는 그가 말한대로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마광수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2년 소설 <즐거운 사라>가 건전한 성의식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음란물이란 이유로 검찰에 구속되면서 입니다. 



소설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성에 대해 보수적인 한국 사회 전반에서, 프리섹스를 추구하는 자유로운 여대생 사라가 온갖 섹스를 즐기며 쾌락을 추구한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소설을 읽어보면 그 음란함은 당시 PC통신에서 돌아다니던 <엄마의 유혹>과 같은 평범한 야설 수준과 거의 비슷하다. 마광수는 강의 중에 경찰에게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같은 쇼와 거장과는 비슷한 수위임에도 다른 처분을 받게되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마광수를 옹호하였으나, 결과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유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당시의 판결문에서, 판사는 "이 판결이 불과 10년 후에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판사로서 현재의 법 감정에 따라 판결할 수 밖에 없다" 고 명시하였습니다.


사건 당시 유력 보수일간지 등의 지면을 통하여 마광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식인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서울대학교의 손봉호 교수는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유행한다, 마광수는 교수가 아니라 마광수 씨로 불러야 한다" 등 공격적 발언을 쏟아내면서 자신의 위세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이태동 같은 사람들은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여대생과 그를 가르치는 교수 사이에서 문란하고 변태적인 성 관계가 성실한 노력의 상징인 학점의 흥정대상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는 주장으로 마광수와 여제자 사이의 모종의 성적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광수 교수 자신은 <즐거운 사라>만 그리 혹독한 처분을 받은 것이 일단 교수가 쓴 것이기 때문이고 주인공 '사라'가 방탕한 쾌락 끝에 불행지거나 정신차리는 교훈적, 도덕적 결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또한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 잡지에 연재될 때는 누구도 클레임을 걸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으로 마광수를 법적 처리하라고 검찰에 "명령"한 것은 당시 현승종 국무총리인데 현승종은 원래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였고 정치적으로도 매우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일설에는 연세대 교수가 그런 소설을 썼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검찰에 그런 지시를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마광수는 당시 연세대학교 교수직에서 해임되었으나 1998년에 다시 교수직에 복직하였습니다. 그러나 <즐거운 사라>는 아직도 재판이 허용되지 않는 금서이며, 마광수 본인은 다른 교수들 사이에서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현세 화백의 <천국의 신화>와 함께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답없는 논쟁을 사회전반에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 교수는 훗날 <즐거운 사라>를 인터넷에 다시 올렸다가 2007년에 약식기소되기도 하였습니다. '달라진 시대상에 비추어 봐도 음란물이기는 하지만 과거 정식기소했을 때보다는 음란성이 약하다'라는 것이 약식기소의 이유였습니다.



마광수 본인은 "10년 정도 지나면 어처구니 없던 해프닝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 말대로 위키러들이나 누가 보기에도 웃기는 옛날 해프닝이 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즐거운 사라>는 재출판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른바 '유미주의적 쾌락주의'를 전적으로 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쾌락은 모든 사건의 근본이자 목표라는 것. 사실 그렇게 이해못할 사상도 아니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얼마든지 주장될 수 있는 사상이지만,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마광수가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자 이문열을 필두로 많은 동료 문인들은 '그런 쓰레기같은 소설을 쓴 자는 소설가로 부를 가치조차 없다'고 맹비난을 가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을 마광수의 적으로 돌리게 만든 '외모 우월주의'로도 악명이 높았습니다. 2005년 MBC 백분토론에서 "예쁜 애들이 공부도 잘한다"고 발언한 사례는 아주 유명합니다. 다만, 해당 발언 자체는 '예쁜 애들이 머리도 좋다'는 식의 억지스러운 건 아니고, 외모나 몸매를 가꾸는 것 역시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공부 역시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논조였다. 한마디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자기 관리를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외모에도 신경 써서 상대에게 호감을 주는 모습을 갖추려고 할 것이라는 이야기. 타고난 생김새처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영역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형수술도 의료보험 대상으로 해야한다는 주장 역시, 공교육을 확충하자는 주장과 비슷한 맥락인 셈. 하지만 같은방송에서 발언한 "외모 보고 반하지 마음보고 어떻게 아나?", "마음이 고와야 여자다. 얼굴이 예쁘다고 여자냐'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 등의 발언을 보면 그가 온전히 자기개발과 외모관리의 상관성을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다만, 이러한 관점이 '인간 각각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고, 일원적인 기준에 따라 모든 사람을 평가하려는 전근대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물론 가능합니다. 자기 영역에서 비할 바 없는 성실함을 보이지만, 외모에는 전혀 신경 안 쓰는 사람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또는, 자기 관심분야에서는 실컷 급진적인 척 하더니, 정작 인간관 자체는 근대적인 근면성실주의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났다고 비판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부부강간죄, 성희롱 방지법, 원조교제, 즉 미성년자 성매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을 남성을 억누르는 악법이라고도 주장하여 논란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부부강간죄의 경우는 부부간의 특수한 관계에 비춰 생각해 볼 때 성관계에 대한 (능동적인) 동의를 부부 외의 성관계와 같은 수준으로 요구할 수는 없고, 부부강간죄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로 여성계가 제시한 사례들은 형법 체계 내에서도 처벌이 가능한 사례들이라는 주장이고, 성희롱 방지법 부분은 가해자의 행동에 대한 객관적 판단 기준 없이 피해자의 입장만으로 성희롱이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 법적 형평성과 합리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며, 미성년자 성매수자 신상 공개 문제는 살인이나 강간같은 흉악범죄를 저지른 자도 신상공개를 당하지 않는데, 미성년자 성매수자의 신상을 공개한다는 것은 미성년자 성매수를 살인, 강간등의 흉악범죄보다 더 무겁게 처벌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으며 만 15세~19세의 청소년을 만 14세 이하로 (법적인) 자기책임능력이 없는 청소년과 같은 기준으로 대하고 있으며 미성년자 성매수에 대한 형사적 처벌을 받은 상태에서 신상공개를 또 하는 것은 이중처벌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주장에 가깝습니다. 사실, 글의 논조가 과격한 점이나 편견에 기반한 점이 많고 주장에 억지스러운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고, 이 때문에 널리 동의를 얻기 힘든 주장임은 분명합니다.


2006년 4월에 출간된 시집 <야하디 얄라숑>에 실린 <말에 대하여>가 1983년 홍익대 교지에 실린 김이원의 시 <말에 대하여>와 똑같은데 당시 마광수 교수는 홍익대 국문과 조교수 겸 교지 편집위원으로 일한 바 있습니다. 논란이 일자 본인은 도용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시집을 내지 않는 제자의 시가 묻히는 것이 아까워서 그랬으며 이전에 제자와 대화하면서 협의가 된 줄 알았다고 하지만 당연히 도용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이라는 비판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본인은 내가 미쳤나 보다 하면서 잘못을 시인하고 언론에 공식 사과했으며 이후 문제가 된 시집을 모두 수거·폐기함으로써 법정 싸움까지는 가지 않고 사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한편 이메일을 통해 창작을 지도하던 주부의 작품을 도용했다는 논란도 있었는데 이는 마 교수와 주부 간의 사전 협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련의 도용 논란으로 인해 마광수 교수는 연세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정직 2개월과 2007년 1학기 출강 금지의 경징계를 받았습니다.




더 많은 분이 이 글을 보실 수 있도록 "공감"  ♥ 한 번씩 눌러주세요. 

로그인도 필요 없습니다. 


꼭 한 번만   "공감" 눌러주세요 +_+

감사합니다.  ^.^ 


'인물백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재홍 대표  (0) 2017.09.07
금나나♥  (0) 2017.09.07
우윤근 주러시아대사  (0) 2017.09.05
손혜원 의원  (0) 2017.09.05
김가영♥장우혁  (0) 2017.09.01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