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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평민 의병장 이였던 신돌석 장군에 이름이 잠수함에 붙여서 신돌석함으로 부활했다. 신돌석함은 해군의 1800톤급 최신예 잠수함으로 부활해 대한민국의 영해를 지키게 된다. 신돌석함과 신돌석 장군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신돌석함


해군은 14일 새로 건조 중인 214급(1800t급) 잠수함 9번함에 구한말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울산 현대중공업이 건조 중인 신돌석함은 다음달 초 진수되고 2018년 말 해군에 인도될 예정입니다.


신돌석함은 대함전 및 대잠수함전, 공격기뢰부설 임무 등을 수행할 수 있고 적의 핵심시설에 대한 장거리 정밀 타격이 가능한 국산 순항미사일을 탑재합니다. 


1878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신돌석 장군은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고향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3000여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일제에 맞서 싸웠습니다. ‘태백산 호랑이’라고 불리며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신 장군은 1908년 11월 18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정부는 1962년 신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처는 1998년 11월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해군은 항일 독립운동에 공헌하거나 국가 위기 극복에 기여한 위인의 이름을 214급 잠수함 함명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214급 1번함의 함명을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을 기리기 위해 ‘손원일함’으로, 2번함은 고려시대 수군 창설과 남해안 왜구를 격퇴한 정지 장군 이름을 함명으로 제정했습니다. 3번함부터는 안중근함, 김좌진함, 윤봉길함, 유관순함, 홍범도함, 이범석함 등 항일 독립운동가 이름을 함명으로 제정했습니다.


구한말 평민 의병장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신돌석 장군이 해군 1800톤급 최신예 잠수함으로 부활했습니다. 



해군은 14일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한제국 당시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무장 항일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신돌석 장군의 애국심을 기리고 국민 안보 의식 고취를 위해 새로 건조 중인 214급 잠수함 9번함의 함명을 '신돌석함'으로 명명했습니다. 

신돌석함은 대함전, 대잠수함전, 공격기뢰부설 임무 등을 수행할 수 있으며 특히 적의 핵심 시설에 대한 장거리 정밀 타격이 가능한 국산 순항미사일을 탑재합니다.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건조 중인 신돌석함은 다음달 초 진수돼 다음해 말 해군으로 인도될 예정입니다. 214급 9번함인 신돌석함이 해군에 인도되면 해군의 214급 잠수함(장보고-II) 건조 사업이 종료됩니다. 

 


신돌석 장군은 대한제국 시기 항일의병운동의 평민출신 의병장 입니다.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출생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영해 도호부 지역이었습니다. 축산면에 신돌석 장군 생가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구한말 조선의 의병장 중인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사람이었으며 본명은 신태호 입니다.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 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건강하고 용감하기로 소문이 났고, 거리가 되는 시내를 단번에 뛰어 건널 정도로 몸이 튼튼했다고 합니다다. 야사에 따르면, 일제가 전선을 잇는 작업을 하는 중 단숨에 총을 가진 왜병들을 때려눕힌 뒤 전신주 여러개를 뽑아서 패대기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권을 침탈한 일제에 대항해, 평민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의 농민중심 병력은 산악지역에서 주로 유격전을 펼치며, 지세에 능하지 못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성과를 보였습니다. 참고로 그가 처음 의병에 참여한 시기는 나이 19세로 1896년, 을미사변 다음해가 되겠습니다. 따라서 갑자기 평민의병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전공을 인정받아 을사조약(1905년) 때 신분에 관계없이 평민의병장이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신출귀몰한 그의 작전에, 일본군은 크게 경계했으며 회유책이나 현상금을 걸어서 그를 포획하려 했습니다. 전공도 훌륭하여 울진 앞바다에서 일본군 군함 9척을 침몰시킨적도 있습니다.

최후는 그의 부하이기도 했고, 또한 고종사촌이기도 한 김상렬 형제의 손에 살해당했습니다.활발한 의병활동을 펼쳤으나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1907년)때는 양반의병장 중심의 창의군에서 명목상의 직책만 있었을뿐 실제로는 아예 제외 당했습니다. 의병장의 중심이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양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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