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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의원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항소심서 벌금 300만원형을 구형 받았습니다. 이에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항소심 공판에서 검찰은 "20대 총선 선거일에 임박해 다수를 상대로 전파성 높은 방법으로 허위사실을 공표했다"며 이같이 구형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만약 법원이 추미애 의원에게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을 선고하고 이 판결이 확정되면 추 대표는 의원직을 상실하게됩니다. 지켜봐야할 사항입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 


최신 뉴스 -  80만원 구형으로 의원직 유지

 추미애 의원 프로필 및 남편 사진 그리고 정치인생


- 이언주 의원 프로필 바로가기 - 개헌파이며, 김종인 대표 탈당 시 추미애 의원을 비난
추미애 의원은 1958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2남 2녀 중 셋째이자 둘째 딸로 태어났다. 대구남산초등학교, 구남여자중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 한양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하고,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85년에는 같은 대학의 캠퍼스 커플이었던 서성환 변호사와 7년의 열애 끝에 결혼하여 법조인 부부로 이름을 알렸다. 서 변호사는 호남출신인데, 당시만 해도 지역감정이 심하던 때라 영남의 집에서 호남사위를 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서 변호사는 고등학교 때 당한 교통사고로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 이에 추미애의 집안에서는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추미애는 이를 무릅쓰고 1985년 현재의 남편과 결혼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언론에서는 추미애를 가리켜, 그리고 추미애 스스로도 '대구의 딸, 호남의 며느리'라고 부른다. 한편 김대중 전 대통령도 추미애를 정계에 영입한 이후 "호남 사람인 제가 대구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춘천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전주지방법원, 광주고등법원 등에서 판사직을 역임하였다.

광주고등법원에서 판사로 재직 중이던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입문 권유를 받았다. 이후 판사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8월 27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리고 이듬 해인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구 지역에 출마 후 당선되어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6년 문민정부 시절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한총련 연세대 사태 진압과정에서의 여대생 인권유린을 폭로했던 패기있던 초선의원이 바로 추미애 의원이었다.

1997년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의 유세단장으로 일했는데, 당시엔 지역주의가 극심했던 시절이라 대구 출신이 호남 출신인 김대중 당시 후보를 유세한다는 이유로 고향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추미애는 “지역감정의 악령으로부터 대구를 구하는 잔 다르크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유세단 이름을 ‘잔 다르크 유세단’이라고 지었다. 이때 대구에서 지역감정과 맞서 저돌적으로 선전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때 ‘추 다르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펼쳐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를 그가 지지율이 낮을 때부터 지지하였다. 그리고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 다른 당 후보에 비해 지지율이 낮다는 이유로 당내에서 후보 교체를 위한 후보단일화 압박이 있을 때(소위 후단협 사태)도 노무현을 지지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추미애는 "그때 내 반대 논리는 ‘지면 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당원과 국민이 뽑은 후보를 버릴 권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때 정말 회의에서 거칠게 싸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그리고 그해 말에 실시된 제16대 대통령 선거 본선에서는 노무현 후보 캠프의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아 희망돼지저금통 사업을 이끌며 50여억원의 국민성금을 모아 돼지엄마라는 별명도 얻었다.


노무현 또한 추미애 의원에 대해 정치적 동지로 여겼고, 항간에는 노 전 대통령이 그녀를 후계자 중 하나로 생각했을 정도였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16대 대통령 선거 운동 마지막 날인 12월 18일 저녁 서울 종로2가 유세장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는 후보단일화를 이룬 당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대표와 함께 단상에 올랐는데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일부 시민의 연호가 들리자 “속도 위반하지 말라”며 “대찬 여자 추미애 의원이 여기 있다. 국민 경선을 끝까지 지켜주고 제 등을 받쳐준 정동영 최고위원도 어떠냐”고 한 적도 있다. 2003년에는 노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는 특사로 미국과 일본도 방문했었다.
그러나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 때 분당에 반대하며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하여 노무현 대통령과 갈라서게 되었다. 2004년 3월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자 추미애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은 ‘3불가론’을 내세우며 탄핵에 반대하였다. 당시 추미애의 3불가론은 탄핵 대신 개혁으로 지지층의 동요를 막고 탄핵 찬성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지지층이 주도하고 있으니 현혹되면 안 되며 그래도 탄핵을 강행하면 역풍을 맞아 총선에 참패할 것이란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추미애의 의견에 동조한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추미애에게 “당내 2인자가 당론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쏘아붙였다. “너 혼자 잘났느냐”는 비난도 쏟아졌다.

그래도 추미애가 말을 듣지 않자 민주당은 구치소에 수감된 의원 2명에게 달려갔다. 그들의 서명까지 추가해 탄핵을 밀어붙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추미애는 "감옥 간 분들 표까지 긁어모아 탄핵을 한다면 말이 안 된다. 숯댕이(범죄혐의로 수감된 의원)가 검댕이(노무현 대통령)를 나무랄 순 없다. 민주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차라리) 내가 기꺼이 표를 드리겠다." 며 결국 당론에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탄핵소추안발의에 동참하지 않고 반대입장을 고수하던 추 의원은 표결을 앞두고 찬성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후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나흘 뒤, 추 의원은 당직자회의에서 "탄핵 이후 국정불안을 우려해 탄핵소추를 반대했을 뿐 탄핵 사유가 틀려서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탄핵사유는 줄이고 줄여도 책자로 만들 정도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선거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 탄핵발의에 동참하지 않았던 내가 탄핵 찬성론자들을 말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추미애가 당초 '탄핵반대 3불가론'에서 예측했던 대로 탄핵반대여론 역풍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곧이어 실시된 2004년 17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은 선거운동과정에서의 당의 얼굴격인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추미애에게 맡겼다. 이후 선거운동과정에서 탄핵반대여론 역풍을 직시한 추미애는 3보1배를 하며 민주당이 탄핵에 동참한 것에 대해 사과하였다. 그러나 탄핵반대 여론의 역풍을 막을 순 없었고, 민주당은 17대 총선에서 9석의 의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이때 추미애 본인도 낙선하였다.

훗날 추미애는 “내 정치 인생 중 가장 큰 실수이자 과오가 탄핵에 찬성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추미애가 탄핵에 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시절에 세번씩이나 추미애에게 장관직을 제안했고, '무릎 아프지 않냐, 괜찮냐. (미국에서) 언제 돌아올거냐' 라며 안부를 물어주었다고 밝히며 "온 몸을 바쳐 통합으로 갚아야 될 강한 책무를 느낀다."고 말했다
낙선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추미애는 귀국 후, 2007년 8월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해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로 출마한 정동영 캠프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으며,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 광진구 을에 재도전하여 51.3%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됐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9년 7월 환경노동위원장 시절 추미애는 비정규직법을 둘러싸고, 노동부에서는 실업자가 100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협박을 누르고 통과시킨다. 하지만 법안에 영향을 받은 실업자는 더 늘지 않았고, 2달만에 정규직 전환율이 63%에 달하는 성과를 거둠으로써 자신의 식견을 입증시켰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55.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문재인 의원의 선거 캠프의 ‘국민통합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그 이전에는 민주통합당의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2.8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문재인 의원에 의해 지명직 최고위원에 임명돼 문재인 지도부에 입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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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주 의원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95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97년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언주 의원은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 광명시 을 국회의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하여 새누리당 전재희 후보와 무소속 이효선 후보를 물리치고 제19대 광명시 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언주 의원김종인계로 분류되고 있다. - 최신뉴스 - 최명길의원 탈당 - 최신뉴스 - 이언주 의원 탈당!!! 국민의당으로

이언주 의원 프로필 및 (미모의 사진) 김종인 탈당

최명길 의원 프로필 보기http://clickhere.tistory.com/649

이언주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광명을)은 8일 “대표가 와서 이야기는 해야지, 대표가 직접 와서”라며 김종인 전 대표 탈당에 수수방관하는 추미애 지도부를 비판했다.


이언주이언주 의원


'김종인계'로 분류되는 이언주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 전 대표를 만난 후 기자들과 만나 “(의총에서) 좀 예의를 지켜야 한다, 예의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라며 비공개 의총에서 지도부 비판이 있었음을 전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지도부가) 은혜를 모른다"며 "정치 이전에 사람과의 관계가 있는데 그래도 은혜를 입었으면 감사할 줄은 알아야지”라며 거듭 지도부를 강력 질타했다.


그는 “안철수 전 대표 나갈 때도, 다 망해가는 당에 안 전 대표가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 당이 솔직히 살았지 않나. 그 때도 시늉만 했다, 말리는 시늉만. 우리가 다 보지 않았나”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최명길·진영 의원 등의 동반 탈당설이 나도는 데 대해선 “더 있을 거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각자 판단하는 것”이라며 “(김 전 대표는) 책임을 져주고 자리를 주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니 가치를 보고 각오하고 나가는 것”이라고 동반탈당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학력

1991년 영도여자고등학교 졸업

1995년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 학사

2000년 연세대학교 법무대학원 경제법학 석사

2004년 Northwestern University 법학 석사


경력

1997년 :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29기 수료)

2000년 : 법무법인 충정 변호사

2004년 : 르노삼성자동차

2008년 : 에쓰오일 법무총괄 상무

2009년 : 인하우스카울슬로펌 부회장

2011년 : 한국여성변호사회 상임이사

2012년 : 한국사내변호사회 감사

2012년 : 희망코리아정치연대 공동대표

2012년 5월 ~ 2016년 5월 : 제19대 국회의원 (경기 광명시 을)

2012년 : 제19대 국회 전반기 보건복지위원회 위원

2013년 : 민주당 전국청년위원회 위원장

2014년 : 새정치민주연합 전국청년위원회 위원장

2014년 :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토교통위원회 위원

2016년 5월 ~ 2020년 5월 : 제20대 국회의원 (경기 광명시 을)

2016년 4월 ~ 더불어민주당 조직본부장



-최신뉴스-

더불어민주당에서 국민의당으로 소속을 바꾼 이언주 의원(경기 광명을)의 눈물의 연설이 오히려 논란이 되고 있다. 이언주 의원은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국민과의 약속, 대한민국 미래선언’ 행사에서“난 안철수에게 정치생명을 걸었다”며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대해 일부 누리꾼들 사이에서 ‘본심이 드러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민주당에서 국민의당으로 당적을 옮긴 이 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안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이날 연설에서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양당으로 갈라져 조금씩 양보하고 대화하면 금방 풀어질 수 있는 것을 사생결단하고 싸우면서 몇달을 허비하는 걸 보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또 “지금 북한, 주변 강대국 문제는 구한말과 비슷한데 이 와중에 외교문제를 놓고 밖에 나가 국민 편가르고 싸우면서 내가 옳다고 싸우는 양쪽 세력을 보면서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대로 가다간 우리 아이들, 우리 대한민국이 큰일난다. 우리가 대통령 탄핵시켜 조기대선 하는거 아닌가”라며 “저는 안 후보에게 제 정치생명을 걸었다. 오른쪽에선 적폐 청산하고 있는데 또 다시 왼쪽이 적폐를 쌓고 이게 말이 되나. 이번엔 완전히 바꿔야 한다. 이번에 못 바꾸면 몇십년 갈지 모른다”며 눈물의 호소를 이어갔다. 




이 의원은 “누군가 40석 갖고 뭐하냐고 얘기하는데, 정말 기존 관념에 사로잡힌 얘기”라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의석이 작아 이렇게 됐는가. 오히려 자신에게 줄 선 사람이 너무 많아 나라가 몇 동강이 나고 이 지경 됐는데 이제 자기 지지자만 보고 하는 정치를 끝장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래서 전 정말 안 후보가 당선되면 전 다음날부터 우리 한국 정치의 대격변이 일어날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제 대한민국은 보수의 나라도 아니고 진보의 나라도 아니다. 바로 우리 국민 모두의 나라”라며 “안철수 당선돼서 정치 대격변이 일어나고 보수, 진보가 아니라 정말 국민만 생각하는 합리적인 여러 세력이 후보 중심으로 다시 모여 새로운 판을 짜게 여러분들이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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