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당 새 대표에 이정미 의이 선출됐다. 이정미 의원은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를 하는 등 대표로써 바쁜 스케줄을 이어가고 있다. 이정미 의원프로필(나이, 학력, 경력 등 )을 통해 그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이정미 의원


정의당 새 대표에 이정미 의원이 선출됐다. 신임 이정미 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국회에서는 ‘진짜야당 정의당’, 국민 속에서는 ‘민생 제1당 정의당’의 대표로 혼신을 다해 뛰겠다. 2018년 지방선거 승리토대 위에 2020년 제1야당을 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난 11일 정의당 4기 전국동시당직선거 대표 선거 결과, 당대표에 출마한 박원석 후보와 이정미 후보가 각각 43.95%(득표수 5624표), 56.05%(득표수 7172표)를 얻어 이정미 후보가 신임 당대표로 선출됐다. 대표 선거에서는 총 당권자 2만969명 중 1만2978명이 참여해 투표율 61.89%를 기록했다.



3인을 선출하는 부대표 선거에서는 7명의 후보자가 출마했다. 개표 결과 강은미 후보 24.88%(득표수 3019), 한창민 후보 21.48%(득표수 2606), 이병렬 후보 13.75%(득표수 1668), 정혜연 후보 13.74%(정혜연 1667), 이병진 후보 10.15%(득표수 1231), 박인숙 후보 9.28%(득표수 1126), 김태훈 후보가 6.73%(득표수 816)를 얻었다.



정의당은 득표 순서와 청년 할당 등을 적용해 강은미·한창민·정혜연 후보를 부대표로 선출했다.



추혜선 정의당 대변인은 “당헌 및 당규에 따라 청년 및 여성 할당 실현을 위해 부대표 3인 중 청년(만35세 이하) 1인과 여성 1인이 선출돼야 한다. 득표 순으로 1위인 강은미 후보가 그대로 여성 할당을 실현했고, 3위 내에 청년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3위인 이병렬 후보와 4위인 정혜연 후보를 교체해 청년 할당을 실현했다”고 설명했다. 


이정미 신임 대표는 “당원들과 주권자들을 향해 제 몸을 더 낮추겠다. 신발끈을 더 단단히 조이겠다. 정의당의 더 큰 도약을 위해 사력을 다하겠”며 당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또한 “진보정치의 한길을 걸어온 동료이자, 벗인 박원석 후보에게도 감사와 위로의 말씀전한다. 원-팀 정의당으로 늘 함께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이 대표는 2018년 지방선거 승리 토대를 다지고 2020년 제1야당이 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대표는 “ 대선시기 우리 곁을 찾아 온 여성, 비정규직, 청년, 농민, 성소수자 등 정치 바깥으로 밀려난 분들을 우리 당의 주역, 한국 정치의 주역으로 교체해 내자.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삶의 변화를 이루는 일이라면 반드시 달려가고 해결하자”며 “이렇게 아래로 향할 때 우리 당의 외연은 무한히 확대되고, 집권의 시간은 가까워 질 것이다. 저에게 주어진 2년, 당원과 주권자들을 믿으며 함께 승리하겠다”고 강조했다.



프로필

출생 1966년 02월 07일, 부산

소속 정의당 당대표

직업 국회의원

성별 여성

경력

정의당 당대표

제20대 국회의원

국회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송추진위원회 위원

제20대 국회 가습기살균제 사고 진상규명과 피해자구제, 

재발방지 대책마련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

제20대 국회 전반기 여성가족위원회 위원

제20대 국회 전반기 환경노동위원회 위원

국회 동물복지포럼 공동대표

국회 시민정치포럼 공동대표

국회 기후변화포럼 책임연구의원

정의당 정책미래내각 노동부 본부장

정의당 원내수석부대표

정의당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송추진단 단장

미래정치센터 이사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공동대표

정의당 부대표

정의당 대변인

진보정의당 최고위원

민주노동당 대변인

민주노동당 당대회 부의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하자 이정미도 민주노동당에 가입한다. 민주노동당에서 최고위원, 대변인 등을 지냈고, 2011년 통합진보당에서 대변인, 최고위원 등을 지내는 등 핵심 당직을 거쳤다.



2012년 3월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사건이 터진 이후엔 전국연합 출신인 경기동부연합 성향의 당권파와 달리 비당권파(인천연합, 참여계, 통합연대)에 가세했다. 2012년 5월 강기갑을 중심으로 한 혁신비대위의 비대위원으로 참가했다. 그해 7월 비당권파 측 강기갑이 당대표가 되자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 부정경선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통합진보당 선출 비례대표 후보들이 일괄 사퇴했지만 이석기, 김재연 2명은 사퇴하지 않았다. 두 사람에 대한 사퇴가 관철되지 않자 2012년 9월 강기갑 등 신당권파 주요 인사들은 통합진보당을 탈당했고, 이정미도 이 때 강기갑을 따라 탈당했다.



2012년 10월 21일, 통합진보당 탈당파가 진보정의당(훗날 정의당으로 당명 변경)을 창당했고, 이정미는 1기 당지도부 최고위원과 대변인이 됐다. 2013년 7월부터 현재까지 정의당 부대표를 지내고 있으며, 대변인직은 2014년 8월까지 수행했다. 정의당 내에서 이정미는 인천연합 계열의 당원들을 대표하는 위치라 할 수 있다.



정당운동을 하며 이정미는 2004년부터 꾸준히 선거에 나섰다. 2004년 17대 총선에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5번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2008년 18대 총선에선 서울 영등포구갑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4위에 그쳤다.



2014년 7월에 열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이정미는 경기도 수원병(팔달구 일원) 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러나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의 단일화를 연해 중도에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하지만 본선에서 손학규가 2위로 낙선해 결과적으로 야권연대는 실패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2016년 3월 11일 이정미는 당원 2만2147명을 대상으로 한 비례대표 후보 경선에서 여성 1위를 차지해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다.같은해 4월 13일 정의당이 정당득표 7.23%를 기록해 이정미는 20대 국회의원 당선자가 됐다.



이정미 의원이 12일 정의당 신임 당 대표로 업무를 시작했다. 전날 당 대표에 당선된 이 대표는 이날 오전 국립현충원 등을 참배하면서 '포스트 심상정' 체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심상정 전 대표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 대표가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가면서 여의도 정가는 여성 당대표 3인 시대를 계속 이어가게 됐다. 이 대표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 대표는 또 심 전 대표를 이어 당선되면서 연속 여성 당대표 기록도 세우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이 대표는 초선 출신의 여성의원 당대표 기록도 세우게 됐다. 같은 여성 당대표인 추미애 대표는 5선, 이혜훈 대표는 3선이다. 전임자인 심 전 대표도 3선이다.  



 이 대표는 당선 직후 소감문을 통해 "한국 정치가 근본적 재편기에 들어선 지금, 우리에게 두려울 것이 없다"며 "상황을 주도하겠다는 용기와 ‘아래’로 향하겠다는 비전만 있으면 우리는 정치판을 뒤흔들게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 대표는 또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으로 여성과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에도 앞장섰다. 국회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성소수자 축제인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율 명지대학교 정치학교 교수는 "(이혜훈 대표 선출에 이어) 여성 당대표가 또 선출됐기 때문에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정국을 잘 이끌길 기대한다"며 "이 대표의 당선은 여성 정치인 롤모델 증가와 여성 정치 활성화 측면에서 장기적으로 긍정적이다"고 평가했다.




더 많은 분이 이 글을 보실 수 있도록 "공감"  ♥ 한 번씩 눌러주세요. 

로그인도 필요 없습니다. 


꼭 한 번만   "공감" 눌러주세요 +_+

감사합니다.  ^.^ 


'인물백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철수 기자회견  (0) 2017.07.12
황수경 통계청장,김판석 인사혁신처장,류영진 식약처장  (0) 2017.07.12
커피스미스 손태영  (0) 2017.07.12
김영찬 이예림  (0) 2017.07.11
지소연 송재희  (0) 2017.07.10
-
-

윤소하 의원은 1961년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에서 태어났다. 윤소하 의원은 교육행정직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초-중학생 시절 11차례 학교를 옮겼다.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목포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윤소하 윤소하 의원 정의당

윤소하 의원은  신입생 시절 '5월 광주'를 겪었다. 친구들과 함께 목포에서 광주 시민군을 도우려 했지만 "(해남으로) 안 내려오면 가만히 안 놔둔다"는 아버지의 만류로 고향에 내려가야 했다.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꼭 도망을 간 것처럼 늘 마음에 걸렸다"고 그는 말한다. 5.18 이후에는 학내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투쟁 과정에서 총장실을 점거하여 농성하다 제적당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제적당한 이후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1985년 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이 창립될 때 조사연구부장으로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학원안정법 ' 을 제정하려 했다. 윤소하는 이에 대한 반대 시위를 주동한 혐의를 입고 집시및폭력행위등에관한법률위반으로 첫 구속을 당했다. 집행유예로 풀려나 다시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86년 '부천성고문응징 ' 투쟁 관련 수배자들을 보호하다가 또 한 번 투옥되었다.

출소 이후 바로 청년운동에 복귀해 1987년에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아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로도 지역전선을 꾸리는 일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30여 년간 사회운동과 진보정치운동을 이어왔다.


1991년 지자체선거도입 이후 전교조 해직교사인 오영석 교사를 목포민주시민운동협의회의 독자후보로 내세워 시의원에 당선시켰다. 전국 진보운동 진영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제도정치 영역을 개척했다. 그 후로도 민주당 텃밭 목포에서 노동, 청년, 지역 등 독자후보를 진출시키며 3명 모두 당선시키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다. 윤소하는 이때 '선거 또한 우리의 현장 활동, 즉 일터는 물론 삶터에서 나온다' 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2010년 제5회 지방선거를 앞둔 시기에는 전국 최초 학교무상급식주민발의조례제정운동을 통해 10,460명의 서명을 조직했다. 본격적인 선거 시기에는 노동조합과 아울러 생활현장을 조직하는 현장 정치활동으로 목포시 8개 기초의원 선거구 중 4개구에 후보를 내 모두 당선시켰다. 이와 함께 28%의 정당 지지율을 확보하며 비례대표까지 총 5명의 후보를 당선시켰다.


2016년 4월 치러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 비례대표 4번으로 당선되었다. 당내 경선에서는 조성주 후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여서 몇백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윤소하 후보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30년간 노동, 시민사회 활동을 펼쳤고, 그런 연유로 지역의 현장 지지기반이 탄탄하기 때문에 당선되었다는 관측이 있다.


현재는 정의당 전라남도당 위원장, 정의당 예비내각 국민건강복지부 본부장, 세월호TFT 위원장, 고백남기농민대책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어린이병원비걱정제로 캠페인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펼치고 있다. 


많은 분이 이 글을 보실 수 있도록 공감 한 번씩 눌러주세요. 

로그인도 필요 없습니다.

^.^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