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두언 전 국회의원 프로필 - 박근혜, 문재인


정두언전 국회의원, 정두언



정두언 1957년 3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학력

- 서울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3학년 재학중

- 국민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정책학 석사

- 경기고등학교

- 배문중학교

- 창서초등학교

정두언은 1957년 3월 6일에 서울에서 운전기사인 아버지와 공사장 잡일을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주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일제 시대 때 군수를 지냈고 아버지는 해방후 만주에서 귀국하여 사촌 형의 인연으로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의 아저씨뻘 되는 친척인 정성태는 먼 친척 동생이던 그의 아버지를 각별히 여겼는데 이때문에 그의 가족은 정성태 전 의원을 큰 아버지라고 불렀다. 정성태는 설산 장덕수의 권고로 한민당에 입당한 이래 민주당, 신민당에서 활약하였으며 64년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했다. 또한 1969년 8월 31일 광주에서 ‘3선 개헌반대 천리길 헌정수호행진’을 시작해 11일 동안 걸어서 서울에 진입하려다가 정사복 경찰중대에게 저지당하고 서울 삼청동 자택으로 이끌려갔다.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친척 형인 정성태 의원의 운전기사를 한 연줄로 일가가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창서국민학교와 배문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정두언은 청소년기에 가정이 불우한 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서대문 모래내 시장에 좌판을 펴서 5남매를 교육시켰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자기애 또는 자존심을 들어냈다."며 자신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고백하기도 했다.


1973년에 경기고에 진학하였다. 중학교 때부터 그는 팝송을 많이 불렀는데 화장실에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노래를 불렀다 전해지나 가수의 꿈을 접고 서울대 무역학과에 진학하였다. 서울대 재학 시절 록밴드를 결성했다. 보컬그룹명은 'spirit of 1999'였는데 세기말을 염두에 둔 작명이었다. 정두언은 학과에서 스타급이었다. 술자리나 회식 또는 연수회를 가면 언제나 사회를 맡았고 분위기를 주도하였다.[3]


그 뒤 진로를 고민하며 도서관에서 생활하던 중 대학 졸업을 앞두고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 당초 고시 성적이 우수했지만 실습점수가 0점이었다. 구청 인사 담당자와 시비가 붙자 해당 관계자가 악심을 품고 영점 처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다른 인사 담당자가 그를 합격시켰다. 그 뒤 행정고시와 사법시험 합격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인 장교 복무 대신 사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강원도 양구의 부대에서 복무하고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그 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 사무관시보에 임용되었다.

관료 생활


그 뒤 행정 사무관시보로 임관 후 정무제2장관실에 배속되었다. 당시 노태우 정무제2장관을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년 간 정무장관실,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등을 거쳤다.


노태우가 정무제2장관에서 문화체육부장관으로 발령나자 그를 따라 문화체육부에 배속되어 올림픽 개최 지원업무를 담당하였다. 1985년 1월에는 국무총리실로 발령, 청소년대책반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 뒤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으로 있을 때 상사의 순직을 보기도 했다. 1987년 4월에는 4.13 호헌 결사 반대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 해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KBS 방송의 드라마급 주연을 뽑는 KBS 탤런트 공채에 했던 그는 4단계 최종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로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1991년 미국으로 특별 유학, 2년 간의 연수를 받았으며 이 기간 중 조지타운 대학에도 다니면서 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겨 국무총리실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 등을 지내고 2000년에 정계에 입문하라는 이회창의 권고로 정계 입문을 결심, 사직서를 제출, 의원면직하였다. 그러나 2000년 선거에서는 낙선하고 말았다.


정계 입문

정계 입문 초기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2000년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했다가 장재식 후보에게 2000표 차이로 떨어졌다. 이 때의 참패로 그는 우울증을 겪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우울증 치료를 받고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2개월간 병상에 입원했던 그에게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는데 국회의원 이명박이었다.


당시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 중이던 이명박은 정두언에게 정중히 캠프 합류를 권했다. 그렇게 그는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자 캠프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이명박은 그에게 "공직생활 20년을 채워 연금을 타도록 해주겠다"며 정 의원을 영입했다.그는 '이명박의 컨셉이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서울시장 출마를 거의 혼자 준비했다.'는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고 이명박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서울시 부시장


민선 3기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당선으로 서울시 정무 부시장이 되었다.


2003년 서울특별시 프로축구단 추진위원장[5] 에 위촉되었다. 2004년 서대문(을)구에서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01년 그는 공무원 생활의 경험을 근거로 총리 등 행정부 고위 관료의 부끄러운 실태를 공개하고 비평한 책인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를 발표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치 활동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명박후보 캠프의 선대위 기획본부장과 전략기획 총괄팀장으로 활동하며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자 캠프에서 선거 전략을 담당하였으며, 2007년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17대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이 되었다.


2008년 18대 총선에 재선한다. 2010년 7․14 전당대회에서 지도부에 입성, 최고위원으로서 중도개혁과 보수혁신의 길을 주장하였고,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2001년 출판된 저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는 비효율적인 행정 행태를 비평했으며, 2011년에는 《한국의 보수, 비탈에 서다》라는 또 다른 저서를 출간하였다.또한 가수로 4집 앨범까지 내기도 했다.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