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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로필 (위선적인 신자보다 무신론자가 낫다)


프란치스코 교황는은 “우리는 가톨릭 신자가 무신론자보다 더 훌륭할 것이라는 말을 너무나 자주 듣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교황명     프란치스코 (Franciscus)


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시보리 (Jorge Mario Bergoglio Sívori)


생년월일  1936년 12월 17일 (82세)


출생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재위기간  2013년 3월 13일 ~


즉위미사  2013년 3월 19일 ~

베네딕토 16세에 이어 교황관 대신 3개의 줄이 있는 주교관이 위에 있고, 예수회 문장과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별, 남편인 나자렛의 성 요셉을 상징하는 나르드(Spikenard) 꽃이 새겨져 있다. 추기경 때 문장과 다른 건 하얀 별과 나르드가 금색으로 바뀐 것 뿐. 사목표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이례적이다. 그리고 중앙에는 자신의 소속이었던 예수회의 문장이 있다.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세속적으로 우리는 주교요, 사제요, 추기경이요, 교황일 수 있지만, 주님의 진정한 제자는 될 수 없다. 진정한 권위는 봉사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자. 아주 가난하고, 약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 교황 프란치스코

가톨릭의 제266대 교황으로 역사상 최초의 남아메리카·남반구·신대륙·예수회 출신 교황이자, 시리아 출신인 제90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82년만의 비유럽권 국가 출신 교황이다. 또한 요한 바오로 1세 이후 35년 만의 이탈리아인 교황이다.


일찍이 교황 바오로 6세는 "앞으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거룩한 성인이신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규칙을 깨고 오직 교리에만 순종했기 때문입니다."라며 탄식했었다. 하지만 베르골료 추기경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역사상 최초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했는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른 것이다.


전임 교황의 이름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교황명을 정한 것은 요한 바오로 1세 이후로 35년 만인데, 요한 바오로 1세도 사실 요한(23번)과 바오로(6번)로 각각 생각해 보면 이미 흔히 사용된 이름이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에 한번도 쓴 적이 없는 이름으로는 913년에 즉위한 제123대 교황 란도 이후로 딱 1100년만이다. 교황은 교황명을 이렇게 정한 이유를 기자들 앞에서 직접 밝혔는데, 콘클라베에서 3분의 2 득표를 했을 무렵 옆자리에 앉아있던 브라질 상파울루 명예주교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이 그를 안고 입맞춤하며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순간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올랐다고 하였다.


선출 당일 한글 표기가 정립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한국 언론은 프란치스코 1세, 프란시스코 1세, 프란체스코 1세 등 중구난방으로 표기했으나, 바티칸과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입장에 따르면 올바른 한글 표기는 프란치스코, 정식 교황명은 프란치스코 '1세'가 아니라 그냥 '프란치스코' 이며, 훗날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쓰는 다른 교황이 나온다면 그 때 가서야 프란치스코 1세로 불릴 것이라고 한다(관련기사). 사실 원래 이게 맞는 건데 요한 바오로 1세 때가 이례적이었다 보면 된다.

출생과 성장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이탈리아 출신 철도노동자 마리오 호세 베르골료(Mario José Bergoglio)와 레히나 마리아 시보리(Regina María Sivori) 사이에서 1936년 12월 17일에 태어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 졸업하고 예수회에 입회해 32세에 수사신부가 되었다. 젊은 시절 경위가 불분명한 폐렴 합병증으로 한쪽 폐를 절제해 50년 넘게 한쪽 폐로 살고 있다. 한때 바운서로 일한 적도 있다 한다. 바운서를 할 정도라면 왕년에 한 주먹했다는 얘기인데…


사제가 되기로 한 계기가 조금 독특한데, 12살의 어린 나이에(!) 아말리아라는 여자아이에게 러브레터를 건네며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받아주지 않으면 신부가 되겠다"고 청혼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말리아 할머니는 60여 년이 흐른 2013년 그가 교황이 되자 말 그대로 기절초풍했다고 한다. 그녀가 자랑스레 공개한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실 다른 여자친구가 없었는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다만, 청소년기 탱고를 같이 춘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단순히 꼬마 시절에 실패한 고백 때문에 사제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에 대해 침묵했던 전적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 관련 건으로 인권단체에서 2010년도에 고발된 적이 있다. 예수회 소속의 사제 2명이 독재정권에 납치되어 고문당한 사건에 침묵했다는 의혹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황이 아르헨티나 군부 유력자의 가족신부 등의 개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독재자들에게 사적으로 선처를 호소하였고, 두 사제는 결국 풀려났다고 밝혀졌다[5].


비겁해 보일지는 몰라도, 이는 쿠바의 가톨릭 사제들도 택하고 있는 나름의 실용적 전략이다. 당장 정권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직접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타협과 조정을 통해 어떻게든 사람들을 돕는 것도 현명한 전략이다. 게다가 교황이 군사독재에 찬성한 것은 결코 아니며, 군부의 살인부대에 쫓기는 사람들을 숨겨주고 자신의 여권을 주어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의 개인적인 저항을 적극적으로 했다.

아르헨티나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성직자들이 '애국주의' 선언을 통해 군사독재와 결탁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지만, 이건 상황에 따른 것이다. 독재와 인권탄압 수준에서 당시 아르헨티나는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정부를 비판하면 코렁탕 정도가 아니라 쥐도 새도 모르게 자루에 넣어져 대서양에 수장되거나 생매장으로 끔살당한다.[6] 즉, 적극적으로 전면저항에 나설 경우 프란치스코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례로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당시에는 월드컵 결승전이 치러지던 당일 그 시각에, 그 경기가 치러진 경기장 바로 옆 건물에서 호르헤 비델라 정권 반대인사를 고문하고 있었다. 물론 이보다 더한 건 역사적으로 따지면 히틀러와 스탈린이나 옛 조상 나라의 선배뻘인 스페인의 프랑코 정도이고, 동시대로 따져봐도 칠레의 독재정권이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을 압도하긴 했지만, 당시의 아르헨티나가 살인적인 군부독재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국가에서 추기경이 공개적으로 정권에 대한 반대를 조직한다면 교황청과 타 가톨릭 국가들의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생명에 위협을 미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전에 언급된 자신의 여권으로 독재에 탄압받는 정치범을 국외로 탈출시켜주는 행위도, 들켰으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한 정치범 생존자는 당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너무나 침착하게 선뜻 도와서 "자기가 어떤 곤경에 뛰어들고 있는지를 정말 알고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비슷한 예로 이웃나라 엘살바도르에서는 1970년대에 독재에 저항하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 중에 대중의 눈 앞에서 사살당했는데도 범인들은 밝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엉뚱한 사람들이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다.[7] 요한 바오로 2세가 맞서 싸웠던 스탈린주의 이후의 공산당이나 김수환 추기경과 대립했던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를 보느라 말이 통하기라도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8] 당시 베르고글리오 신부였던 교황은 "(군부에게) 믿음을 심어줘서 누가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하게 하는 전략을 썼"던 것이다. 


2014년 즉위 1주년을 앞두고 앞에서는 침묵했지만 뒤에서는 은신처를 제공하고 해외도피를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최소 20~30명, 최대 100명까지 반정부 인사들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3만 명이나 희생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의 참상에서 수십 명 구했다는 것이 침묵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비판은 가능하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분명히 나은 행동이며, 위쪽 문단에서도 설명했듯이 은신처는 물론 해외도피까지 실제로 도왔다는 점에서 자신의 위험도 기꺼이 무릅썼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특히나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벌일 수 있는 일에 대한 한계를 생각할 때 이 정도면 꽤 선방한 것이다. 즉 당시에 교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해서 교황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비판은 비판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도… 이 부분은 2015년 12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다만 시골 하급 성직자 운운하기는 좀 그런게, 그는 1973년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있었던 호르헤 비델라 군사독재 기간 동안 가톨릭 국가 아르헨티나에서 그보다 높은 직위의 성직자는 없었다. 또한 구한 사람은 구한 것이지만, 정작 자신이 체포 등에도 관여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최상단 납치 피해자였던 신부 2명중 한명인 올란도 요리오 신부[9]는 1985년 재판에서 주교가 명단을 넘겼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2000년대에 벌어진 재판에서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수차례 재판 출석 자체를 거부했으며, 단 한번 출석한 재판에서도 모든 증언을 얼버무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교황으로 즉위하는 그 시점에도 그는 재판장에 피의자로 불려다니고 있었다. 교황이 되면서 이 문제가 흐지부지 되었지만, 만일 교황이 되지 못했다면 본격적으로 말이 나올 상황이었다.


칠레의 라울 실바 엔리케즈 추기경과도 대비된다는 견해도 있다. 추기경이자 산티아고 대교구장의 직위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맞이했다. 엔리케즈 추기경은 해당 쿠데타를 즉각 비난했으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살육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쿠데타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서 정교회, 유대교, 개신교 등과도 연합해서 대립했다. 그래서 군사 쿠데타가 붕괴된 이후 칠레에서 성인이나 마찬가지 대우를 받았으며, 칠레 500페소 주화에 그 얼굴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정치적 문제로 대립했다라는 이유로 1983년 산티아고 대교구장 직위에서 은퇴해야 했다.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주교에 임명되었고, 2001년 2월 2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추기경에 서품되었다.

추기경 재임 시 아르헨티나 동성결혼 법안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국제사면위원회 등의 인권단체의 비판이 많았다. 반대운동 때 동성결혼과 피임을 확대하는 정책을 펼치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에게 "중세적 마인드를 가진데다가 이단심문관 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때문에 서로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아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추기경 시절인 2012년 성명을 통해 대통령을 "독재를 노리는 선동꾼"이라고 비판하였다. 페르난데스는 페론당(정의당) 출신 정치인으로[11] 실제로 후안 페론&이사벨 페론 부부에 이어 아르헨티나 2번째의 부부 대통령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의 동성결혼 합법화 및 입양조건 동등화는 상하원 모두에서 통과되었다.


교황이 수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시 교황이 비난했던 것은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통해 통치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어휘가 강했을지는 몰라도 타당한 비판이다. 정치학이나 행정법을 공부하면 약간이나마 언급되는 부분인데, 원래 행정명령은 제왕적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를 우회하여 삼권분립을 무너뜨리는 단골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위임민주주의의 일종으로 "포고령주의"로 불리는 행정명령의 남용은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방해하고 법을 통한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장 조지 W. 부시가 행정명령을 애용했다.

그런데 베르골료 추기경이 교황이 되자,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그에게 포클랜드 섬에 대해 영국의 군사적 증강을 막고 자신과 대화 창구를 놓아달라는 개입 요청을 하였다. 교황의 공식 반응은 아직 없지만, 영국은 교황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주권 국가 사이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매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 탓에 가만 있다가 불똥이 튄 격인데, 이래저래 악연인 듯.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번 기회를 통해 가톨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2015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건강상의 문제로 퇴위한 후에 치러진 콘클라베 이틀째인 2013년 3월 13일 오후 7시 기준으로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청이 부패 스캔들과 섹스 스캔들로 홍역을 치른만큼 개인적으로 청렴하고 교리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사회적으로는 개혁적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차기 교황으로 선출된 듯. 그동안 거론되던 주요 교황 후보는 아니지만 인지도가 아예 없던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비유럽파 추기경들은 개혁적인 교황을 원했으나 적절한 후보를 내지못한 상태에서 콘클라베에 돌입했다고 한다. 투표 전에 모든 추기경들이 소신을 피력하는 개인발표 시간이 있었는데, 이때 베르골료 추기경이 교회가 본연의 영적인 임무에 돌아가야 한다고 피력한 것이 결정적이 되었다. 그의 이런 피력을 계기로 개혁파 추기경들이 그에게 주목했고 뒤이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투표가 진행돼서 개혁파 추기경을 중심으로 의견이 정리되고 미국의 추기경인 우얼 대주교가 미국 표를 끌어모으고 일부 유럽표가 그에 가담하면서 베르골료 추기경은 수월하게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가디언의 추측으로는 전 교황 선출 때도 이미 득표 수가 2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14]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례적으로 빠른 콘클라베의 결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고령으로 인한 건강 문제 때문에 퇴위했음에도 고령인 프란치스코가 선출된 것을 놓고 추기경단이 '몇 년 간의 시간벌기'를 선택했다는 관측이 있다. 한편 그의 선출에 베네딕토 16세의 의중이 크게 작용했다는 음모론도 나왔다.


그의 교황 취임을 두고 흑인 교황을 기대했던 아프리카에선 섭섭해하는 분위기이다. 이탈리아인 교황을 바랐던 이탈리아에선 아쉬워하면서도 이탈리아계 이민자 교황이라서 좀 낫다는 분위기. 물론 남미에선 역사상 첫 남미인 교황이라고 기뻐하는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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