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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프로필 - 암살 위협 있었지만 극복 (암살 미수)


황장엽황장엽 암살 미수 사건




황장엽은 1923년 2월 17일에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황원택의 아들로 출생하였고 평양에서 성장하였으며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버지 황원택은 본부인을 여의고 재혼한 부인에게서 황장엽과 아우 황봉엽 두 형제를 보았다. 일찍 사망한 그의 아버지 황원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다.


1942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주오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강제소환되어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약 1년 6개월 동안 강원도 삼척 탄광에서 징용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그 후 서울을 거쳐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인 1946년 24세에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였고 1950년에 졸업한 후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5년에 귀국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았으며 1965년 10년 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고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관여하였으며 김정일을 후원하여 주체사상 개인강사를 맡기도 했다.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차장

김일성 유일통치체제를 전당과 전사회에 구현하였고, 제1부-선전지도부, 제2부-교양지도부, 제3부는 선동선전부, 제4부는 출판보도부문과 문화예술부문 지도부 운영했다.


북조선에서의 정치 활동


197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된 이후, 조선최고인민회의 의장(1972년 ~ 1983년), 1980년 조선로동당 총비서장,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6년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앙위원장, 1987년 조선사회과학자협회장,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장 등 여러 요직을 겸임하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에 주체사상을 체계화하는 역할을 했고 이를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해외에 주체사상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잘 알려지지 않은 지인이 황장엽에게 30년 동안 개혁 개방을 같이 하자며 "너희 그러다가 진짜 망한다.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김정일을 중국에 보내 달라!"고 했고, 이에 황장엽은 김정일에게 중국에서 오라고 하는데 한번 가보라고 제안했다가 "그 나쁜 XX들! 무엇 때문에 중국에 가겠는가?"라며 욕하던 김정일에 의해 결국 당 내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망명과 남한에서의 활동


1997년 주체사상에 관한 강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직후에, 베이징에서 김덕홍과 함께 대한민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였다. 그의 수기에는 망명 이유를 조국(북조선)의 체제에 의분(義憤)을 느껴 그 변혁을 도모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자신의 담당하던 당 국제사업의 실패가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망명 후에는, 각종 강연을 통해 김정일 정권의 타도를 주장하였으나 이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집권 시절에 진행된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그의 주장은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0년간 정부에 의해 활동제한조치를 당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다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 해제되었다. 이후 사망할 때 까지 미국의 보수인사들과 함께 김정일 정권 타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상황을 폭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황장엽이 1997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직후 당 간부들을 상대로 한 비밀연설에서 황장엽을 “개만도 못하다”고 격렬하게 매도했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2010년 4월 4일에 보도했다.

자신이 기초를 다진 주체사상이 북조선에서 김일성·김정일 숭배를 위한 봉건사상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무한할 수 있다"는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관을 김 부자가 ‘수령 절대주의’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공개 강연이 되고만, 지난달 30일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에서 "개인은 죽어도 집단은 영생합니다"라고 강조하는 등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정치철학을 중시했다.


사후


장례식은 양녀인 김숙향 등이 주관하였으며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황장엽의 시신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사건


2006년 12월 21일에 대한민국 사람 김아무개가 황장엽과 관련된 자유북한방송의 사무소에 '황장엽은 쓰레기 같은 그 입을 다물라, 배신자는 대가를 치른다.'라고 하는 내용의 협박문과 붉은 그림도구가 칠해진 황장엽의 사진, 도끼등이 들어간 소포를 보낸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2008년 9월 27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2009년 6월 1일에 김현희를 12년 만에 만났고 함께 투쟁하자고 전했다.

2010년 4월 4일에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인 납북자들에 관한 논의를 한다.

2010년 4월 20일 황장엽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남파된 간첩 2명이 검거됐다.

2010년 10월 10일에 자택에서 좌욕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암살 미수


김영철(인민군 상장) 정찰총국장은 황장엽을 암살하도록 공작원 김아무개와 동아무개 등 2명에게 지시했다. 이 공작원들은 탈북자들 틈에 섞여 대한민국에 유입되었으며 대한민국에 도착하긴 했으나 탈북자 심사당시 남파된 목적이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현재 이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고 2010년 7월 1일 10년형이 확정되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C%9E%A5%EC%97%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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