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독일을 방문한 가운데 김정숙 여사는 윤이상 작곡가에 묘소를 방문했다. 독일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윤이상 작곡가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 김정숙 여사가 따로 방문한 묘소인 만큼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 윤이상 작곡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윤이상 김정숙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G20 회의 참석차 독일을 방문한 가운데 김정숙 여사가 묘소를 직접 방문·참배한 윤이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김정숙 여사는 5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위치한 윤이상(1917~1995) 묘소를 방문해 참배했다. 이날 김정숙 여사는 통영에서 가져온 동백나무를 윤이상 묘소에 심었다. 



통영은 윤이상이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2년 전 유네스코는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통영을 '창의 음악 도시'로 지정하기도 했다.


윤이상은 '첼로 협주곡', '낙양', '협주적 단편',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트리오', '충무공', '달무리' 등의 곡들을 남겼으며 세계적 현대음악 작곡가로 불리고 있다


유럽 음악계는 윤이상을 '서양 악기로 동아시아적 이미지를 연상시킨 최고의 작곡가'로 평가한다.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은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인' 가운데 윤이상을 유일하게 20세기 최고 음악가로 꼽기도 했다.



윤이상은 1959년 베를린음대 졸업 후 독일에서 체류했다. 당시 그는 독일에서 한국 민주화투쟁을 했고 지인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이로 인해 1967년 박정희 정부 시절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다. 



윤이상이 투옥되자 해외 음악계를 중심으로 국제적 항의가 이어졌고 정부는 2년만에 윤이상을 독일로 돌려보냈다. 이후 윤이상은 이념 논란에 시달렸다. 그는 고국에 돌아오길 갈망했지만 일본에서 타계했다.

 


지난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은 당시 정부가 과대 포장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윤이상을 둘러싼 이념 논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정부시절 다시 한번 반복됐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윤이상 평화재단'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지원이 끊겼다. 



최근 개최된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세계적 거장들이 윤이상의 곡을 연주,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흔히 통영이 윤이상의 고향으로 언급되지만, 호적 기록에 따르면 산청으로 되어 있다. 단, 당시 관습으로는 여자가 출산 전후에 친정에 머무르는 관습이 있었으며, 산청은 윤이상 모친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생후 3년 뒤 가족들과 함께 충무(현재 통영)로 이주했고, 서당과 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윤이상은 스스로 자신의 고향을 충무(통영)라 했다.



신식 학교에 다니면서 음악실에 비치된 풍금을 접하고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서양 음악의 기초 이론을 배우는 한편 남사당패나 판소리 명창의 공연에 열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가가 배고프고 불행한 직업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음악 공부를 금지했고, 상업학교로 아들을 진학시켰다.



하지만 입학 후 2년 뒤에 가족들의 뜻을 거스르고 경성으로 갔고, 옛 대한제국 소속의 군악대였던 시위연대 출신의 연주가로부터 화성학을 배웠다. 1935년에는 상업 공부를 하면서 음악을 배워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오사카로 유학했고, 첼로와 작곡, 음악이론 등을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배웠다.


귀국 후 잠시 보통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39년에 다시 도쿄로 유학했고, 프랑스 근대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작곡 활동을 틈틈이 하는 한편 항일 지하조직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사를 일으킬 틈도 없이 경찰에 체포되었고,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2개월의 단기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경찰의 감시를 피해 경성으로 옮겨가 인쇄소 식자공 등으로 겨우겨우 연명했고,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가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부산고 등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했으나, 투옥과 오랜 도피 생활로 얻은 결핵이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투병 경력 때문에 징집에서 제외되었고, 계속 음악교사로 일하면서 전시작곡가협회와 그 뒤를 이은 한국작곡가협회에 입회했다.



휴전 후 가족들과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작곡 교사로 활동하면서 잡지나 신문에 음악 관련 기고문을 발표하거나 실내악 작품을 쓰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55년에 현악 4중주 제1번과 피아노 3중주 두 작품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상금과 기타 여비를 더해 이듬해 프랑스의 파리 국립음악원에 유학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기대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고, 1957년에 다시 서독의 서베를린으로 옮겨 베를린 고등음악학교(현 베를린 예술대학 음악학부)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12음 기법, 작곡을 배웠다. 이 때 스승들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실링과 요제프 루퍼, 보리스 블라허가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1959년에 졸업한 직후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을 발표했고, 특히 후자는 현대음악 작곡가의 등용문으로 유명한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이 성공으로 귀국 계획을 보류하고 계속 서독에 남아 작곡 활동을 진행했고, 동아시아 음악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 형편은 늘 좋지 않았고, 프라이부르크와 쾰른을 거쳐 1964년에 미국의 포드 재단에서 진행하는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 대상으로 선정되어 다시 서베를린에 이주했다. 쾰른 정주 시절에는 월북 음악가였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는데, 이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는 떡밥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윤이상은 북한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콘트라베이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 친구를 만났지만, 냉전으로 인한 서로 간의 입장 차를 좁힐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서고분에서 사신도 벽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영상'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가 되기도 했다.



1966년에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버금가는 현대음악제인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관현악 '예악' 이 초연되었고,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럽의 신예 현대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되었고, 다른 독일 주요 교포 인사들과 함께 고문을 당한 뒤 북한의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불법적인 체포 과정과 혐의 사실의 날조 혹은 과장, 국제 사회의 여론 악화 등으로 2심과 3심을 거쳐 1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투옥 중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을 완성했고, 악보가 독일로 보내져 초연되면서 구명 운동을 위한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후 건강 악화로 서울대학교 종합병원에 입원했고, 투병 중에도 계속 작곡을 하는 한편 강석희 같은 젊은 작곡학도들을 비공식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1969년에 한국 정부가 특별 석방 조치를 내려 독일로 돌아갔고, 2년 뒤 가족들과 함께 서독 국적을 취득했다.



1972년에 모교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작곡과 명예 교수가 되었고, 뮌헨 올림픽 기념 문화행사를 위해 오페라 '심청' 을 작곡해 초연했다. 서독 외에도 미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작품이 연주되었고, 1977년에는 서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 '광주여 영원히!' 라는 관현악 작품을 발표했다.



1982년부터 남북한 양측에서 윤이상 음악의 공연이 개최되기 시작했고,1983년부터 87년까지는 매년 교향곡을 한 곡씩 발표했다. 1987년에는 70회 생일 기념으로 서독 각지에서 기념 행사와 음악회가 개최되었으나,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인해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휴전선상에서 남북 음악가들이 공동으로 공연하는 아이디어를 남북 양측에 제의했으나, 양측의 이견이 너무 커 무산되었다. 그 대신 1990년에 남북의 예술인들이 예술단을 구성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가며 공연했고, 분단 이후 개최된 남북 간의 첫 교환 공연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당뇨 합병증이 악화되어 폐렴 등의 추가 질환이 발생했고, 산소호흡기와 휠체어 없이 생활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1994년에 예음문화재단 주최로 남한에서 '윤이상 음악축제' 가 개최되었는데, 이 때 남한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한국 정부와 갈등이 계속 되어 귀국 계획을 접어야 했다. 한국 정부 외에도 몇몇 과격 운동권 인사들이 베를린에서 벌인 행각-'정치적 논란' 항목에 따로 기술한다-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모든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마지막 작품이 된 '화염 속의 천사' 를 완성하고 이듬해에 도쿄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병세 악화는 계속 진행됐고, 폐렴 재발로 인해 1995년 11월 3일에 베를린에서 타계했다. 장례는 유언에 따라 불교 의식으로 진행되었고,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베를린 가토우의 지방 묘역(Landschaftsfriedhof Gatow)에 안장되었다.




더 많은 분이 이 글을 보실 수 있도록 "공감"  ♥ 한 번씩 눌러주세요. 

로그인도 필요 없습니다. 


꼭 한 번만   "공감" 눌러주세요 +_+

감사합니다.  ^.^ 


'인물백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세훈 재판  (1) 2017.07.07
썰전 박형준  (0) 2017.07.06
윤대진 검사  (0) 2017.07.05
조재연 대법관  (0) 2017.07.05
송혜교 송중기 결혼  (0) 2017.07.05
-
-

김정숙 여사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아내입니다. 두 사람의 프로포즈 일화를 간단히 소개 해드리면 문재인 후보의 100문 100답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래는 그 내용) 상남자 스타일의 멋진 김정숙 여사의 프로필(나이1954년생, 고향(강화도), 학력(경희대)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Q : 54. 프러포즈는 어떻게 했나?

A : 아내가 먼저 했다. 친구들과 있는데 아내가 와서 갑자기 “재인이 너 나랑 결혼 할 거야 말거야? 빨리 말해!”라고 해서 깜짝 놀라 “알았어”라고 했다.


 김정숙 여사 프로필 - 문재인 부인 그리고 프로포즈

김정숙 여사김정숙 여사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한복집을 했으며 아버지가 몸이 안좋아서 요양차 강화도로 이사, 문재인과 결혼 당시에는 강화도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1954년 11월 15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숙명여고나와 경희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친구의 오빠가 문재인과 같은 법대를 다녔다. 1학년 축제때 소개시켜주었다고 한다. 서울시립합창단 단원으로 활동 했었다. 문재인과 대학시절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만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때만 해도 오다가다 인사하는 정도의 사이 요새말로 썸타는 사이였다가 시위하던 문재인이 선두에서 확산되기 전의 응축된 최루가스를 직격당해 쓰러졌다. 이때 김정숙 여사가 간호를 해주면서 사이가 깊어졌다고 한다. 이를 두고 유시민 작가는 "제정신이 아닐때 만나가지고..." 라며 농담을 했고 문재인은 굳이 부정하지는 않고 웃음으로 대답했다. 


1981년 문재인이 사법연수원 시절에 결혼했다. 



김정숙  성악가
출생  
1954년 11월 15일 (만 62세), 서울
학력
경희대학교 성악과 졸업 외 2건
경력
서울시립합창단 단원


문재인


http://info.nec.go.kr/electioninfo/precandidate_detail_info.xhtml?electionId=0020170509&huboId=100120965





더 많은 분이 이 글을 보실 수 있도록 "공감"  ♥ 한 번씩 눌러주세요. 

로그인도 필요 없습니다. 


꼭 한 번만   "공감" 눌러주세요 +_+

감사합니다.  ^.^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