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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욱 부인 박윤희 사진을 확인하시고 싶으시면 아래의 사진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민경욱 의원, 전 대변인은 1963년 경기도 인천시(현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인천신흥초등학교, 동인천중학교, 송도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동 대학교 국제학대학원 행정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민경욱 부인 박윤희 씨는 산부인과 의사이다.


민경욱 의원 부인 박윤희 사진 및 민경욱 의원 프로필

학력

인천신흥초등학교 졸업

동인천중학교 졸업

송도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행정학 학사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행정학 석사

1963년 경기도 인천시(현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인천신흥초등학교, 동인천중학교, 송도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동 대학교 국제학대학원 행정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공보처(현 문화체육관광부) 해외공보관 외신부 전문위원, 연합통신 외신부 촉탁위원 등으로 근무하다가 1991년 KBS 기자로 입사하였다. 보도국에서 주로 정치부, 사회부 기자를 역임하다가 2001년 11월 5일부터 2004년 4월 30일까지는 당시 2TV 메인뉴스 프로그램이었던 KBS 뉴스7, KBS 뉴스8의 앵커를 맡았고 워싱턴 D.C. 특파원 등을 거쳤다. 2011년 1월 1일부터 2013년 10월 18일까지 1000일 동안 KBS 뉴스 9의 평일 앵커를 맡았다. 이후 2013년 문화부장으로 승진하였다.


앵커 시절에는 활발한 트위터 소통을 즐겼다. 기자 출신인 민경욱 앵커에게 '아나운서'라고 부르는 트위터리안이 가끔 있었는데, 민 앵커의 단골 답변은 "아나운서 중에 저처럼 막 생긴 사람 없습니다." 당시 민 앵커의 피부는 타 방송사 앵커 대비 조금 거칠었던 터라 이에 대해 자학 개그를 구사했던 것.


2014년 2월, 오전까지만 해도 문화부장으로서 편집회의에 참석했던 그가 오후에는 청와대에 나타나 신임 대변인으로 인사를 하여 KBS 구성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3] 이를 두고 폴리널리스트라는 비판이 있었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때 구설수에 휘말린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 2015년 말 대변인을 그만두었고, 다음 해 초부터 연수구 일대에서 아침마다 출근길 인사를 함으로써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연수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때 SBS 개표방송에서 공중부양할때 표정이 정말 진국이었다 같은 해 12월 19일 정우택 원내대표에 의해 원내부대표로 임명되었다.


12월 11일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통과된 이 후로 잠잠하던 친박에서 50여명이 심야회동을 하며 혁신과통합연합이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피닉제이인제 전 의원, 정갑윤 국회의원 그리고 김관용 경상북도도지사가 공동대표로 결정됐으며 민경욱 의원을 포함한 친박계 국회의원 51명이 참여한다. 이 회동에서 친박계 의원들은 박근혜 탄핵을 주도한 유승민, 김무성 의원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탄핵 인용 이후, 박근혜의 담화문을 대리로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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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변호사는(1935년 10월 10일 ~ ) 한국의 민사소송법학계의 대표적인 법학자이자 법률가이다


이시윤 변호사이시윤 초대 헌법재판관


본관은 단양이다.

이시윤 변호사는 고등고시 사법과를 합격한 후 법관으로 재직하였다. 이후 초대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되어 헌법재판소의 초기 정착에 커다란 일조를 하였다. 또한 감사원장을 지냈다.


이시윤 저 민사소송법 교재는 사법시험준비생들의 필독서이자 스테디셀러이다. 일본의 민사소송법학을 벗어나 독일 이론을 소개함으로써 탈일본화에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이 교과서 저술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언급되는 조관행 판사가 2006년 법조비리 관련자로 밝혀져서 사법시험준비생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노무현 탄핵심판 사건에서 소추위원의 대리인을 맡기도 했다. 노무현이 사법연수원 다니던 시절 연수원 교수이기도 했던 그는, 탄핵이 정당하다고 생각해서 대리인을 맡았으나 노무현과의 사제의 연을 생각해 직접 나서지는 않고 서면대리만 맡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1996년에는 당시 대권주자였던 이한동씨와 친한 법조계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알려졌다.이한동씨는 1958년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 동기생이다.




1935년 10월 10일 서울 출생

1958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및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1962년 서울대 법대, 서울대 사법대학원, 국민대, 국제대, 이화여대 강사

1962년 서울지법 판사

1963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1964년 서울대 법대 및 사법대학원 조교수

1970년 서울고법 판사(직무대리)

1973년 서울고법 판사

1974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75년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 겸 사법연수원 교수

1977년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80년 서울형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81년 광주고법 부장판사

1982년 서울고법 부장판사

1987년 춘천지법원장

1988년 수원지법원장ㆍ헌법재판소 상임재판관

1993년 감사원장

1998년 변호사 개업 및 명지대 석좌교수

1998년 민사법학회 회장

1999년 법무부 민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

2000년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장[4]

2006년 법무법인 대륙 고문변호사

현재 고려대학교 법무대학원 강사,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이시윤이시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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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측은 또 참고자료 취지로 전문가 의견서를 제출했다. 전문가 의견을 밝힌 이는 헌법재판관을 역임한 이시윤(82·고등고시 10회) 변호사다. 이 변호사가 낸 의견서에는 "이번 탄핵은 소추사유가 많고 사실관계도 복잡하므로 이정미 재판관 퇴임일 이전에 선고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 재판관 퇴임 이전에 평의가 종결되도록 함으로써 사실인정과 법리판단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 바란다"는 취지가 담겼다고 대통령 측은 설명했다. 




-자료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B%9C%EC%9C%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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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의원은 한국의 정치인, 관료. 1955년 2월 27일생. 경상북도 경산 출생으로, 20대 국회 기준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지역구-경산시)이며, 기획재정부 장관 및 경제부총리를 역임했다. 친박계 좌장으로 맏형인 서청원 의원과 더불어 친박계 핵심 의원으로 꼽힌다


최경환 프로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최경환최경환 전 기획재정부 장관

1955년 2월 27일에 경상북도 경산군(현 경산시)에서 태어났다. 1975년에 대구고를 졸업하고 같은 해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재학 중인 1978년 제22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였다. 1979년에 연세대를 졸업하였다.


1980년에 청도군청에서 행정사무관 시보로 근무하고 1980년부터 1994년까지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대외경제조정실에서 근무하였다. 경제기획원 근무 중인 1985년에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1987년에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91년에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여러 요직에서 근무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1994년 재정경제원 국고국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1995년 런던에 있는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선임연구원(Senior Economist)으로 일하였다. 귀국하여 1997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실 보좌관, 1998년 4월부터 1999년 5월까지 예산청 기획관리실 법무담당관, 1999년 5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2002년 4월부터 2002년 9월까지 한국경제신문 편집국 부국장을 맡았다.

2002년 9월부터 2002년 11월까지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 경제특별보좌관을 맡았다. 2003년 2월부터 현재까지 한국경제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제1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2004년 6월부터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제4정책조정위원장과 수도이전문제특별위원회 간사를 맡았으며, 2009년 9월 19일부터는 지식경제부 장관을 맡았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을 대구와 경산의 경계선을 넘어 연장하는 것과 대구, 경북 지역의 과학 기술 연구를 진흥하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2013년 5월 15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되었고, 2014년 7월 15일,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2015년 4월 20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사임하자 사실상 직무대행이 되었다. 이완구 사직서를 박대통령이 4월 27일에 수리한 이후 6월 17일까지 국무총리 권한대행 직을 수행했다.


대표적인 친박계 인사로 계파의 좌장으로 분류되며,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4년 7월에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취임하며 각종 경기부양책을 발표하면서였다. 이러한 경기부양책은 시장에서 초이노믹스로 불렸다. 다만 그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은 좋지 못한 편.


2016년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폭로한 9명의 친박 의원 모임인 이른바 진박 9인회의 일원이다. 최순실 일가와 문고리 3인방 등이 사라져 생긴 박근혜정부의 권력 공백을 2016년 10월 25일 1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날부터 이들이 메우고 지원하고 있다. 최경환, 서청원, 윤상현을 축으로 정갑윤, 원유철, 정우택, 홍문종, 유기준, 조원진이 포진하고 있다. 매일 작전회의를 하여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해준다고 한다. 정황상 탄핵 정국에 혼란을 야기하였던 제3차 대국민 담화도 이들의 치밀한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여자프로농구 제6대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총재직 수락 당시 부천 신세계 쿨캣가 인수 혹은 연맹탈퇴의 기로에 섰는데, 이 위기를 KEB하나은행이 인수하는 것으로 해결돼 여자프로농구가 6구단 체제를 유지하는 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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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남 검찰총장은 1959년 12월 2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김수남 총장의 아버지 김기택은 영남대학교의 총장을 지냈고, 2007년에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했다. 시간이 없으신 분은 하단에 김수남 검찰총장에 대한 간단 요약 프로필이라도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김수남 검찰총장 프로필 - 우병우 전 민정수석 통화, 박근혜 영남대

김수남김수남 검찰총장

출생일 1959년 12월 29일

소속         대검찰청 검찰총장

직업         정무직공무원

학력

-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

- 청구고등학교 졸업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50·사진)이 지난해 청와대를 겨냥한 검찰의 수사가 벌어질 당시 김수남 검찰총장(58),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59)과 직접 전화 통화를 한 사실이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조사 결과 드러났다. 김 총장과 이 지검장은 당시 민정수석에 재직 중이던 우 전 수석이 건 전화를 받은 것으로 특검은 확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피의자 조사를 마친 검찰이 구속영장 청구를 놓고 고민에 들어갔습니다. 혐의만 놓고 보면 이미 구속 사유가 충분하다는 중론 속에 대선 정국에 돌입한 정치적 상황 등이 변수가 될 전망입니다.

대구광역시 청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에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해 1984년에 사법시험 26회에 합격했고 1987년에 사법연수원을 16기로 수료했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과는 연수원 동기다.

처음엔 대구지방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했지만 3년 뒤에 검찰로 옮겼다. 법무부 검찰3과 검사, 광주지방검찰청 공안부장검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3과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검사, 법무부 정책홍보관리관, 법무부 기획조정실장, 청주지방검찰청 검사장, 범죄예방정책국장, 서울남부지방검찰청 검사장,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검찰청 차장을 지내다가 2015년 12월에 41대 검찰총장으로 승진했다.

[1]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재직했던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영남대 총장을 지냈다. 

[2] 그의 검찰총장 재직기에 경찰청장을 지내고 있는 강신명은 그의 청구고 4년 후배이다. 검경의 수장을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 맡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두 사람이 사석에서도 만날 정도로 아는 사이기 때문에 청와대에선 그를 검찰 수장에 올리면 안 된다는 의견도 일부 나왔다고 한다.

[3] 지방검찰청 검사장은 줄여서 지검장이라고 한다.

[4] 이때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5] 서울중앙지검장은 지검장 가운데 유일하게 고검장(고등검찰청 검사장)급이다.

[6] 사건이 배당된 지 무려 21일만에 이뤄진 '늑장' 압수수색이었던 데다가 해당 압수수색은 언론홍보였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경력

2015.12                 제41대 대검찰청 검찰총장

2015.02 ~ 2015.12 대검찰청 차장검사

2013.12 ~ 2015.02 제56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지검장

2012.07 ~ 2013.12 제33대 수원지방검찰청 지검장

2011.08                 제10대 서울남부지방검찰청 지검장

2010.07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 국장

2009.08 ~ 2010.07 제60대 청주지방검찰청 지검장

2009 법무부 기획조정실 실장

2008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 검사

2007 인천지방검찰청 2차장 검사

2006 법무부 정책홍보관리관

2005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4부 부장검사

2004 대구지방검찰청 형사2부 부장검사

2003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3과 과장

2001 광주지방검찰청 공안부 부장검사

2000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부장검사

1999 대구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

1997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94 법무부 검찰3과 검사

1992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검사

1990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87 대구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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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선 행정관 프로필 도대체 누구일까?  (사진) - 특검 오늘 소환

이영선 행정관은 건장한 체구가 보여주듯 유도 선수 출신입니다.


이영선 행정관은 2007년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지금 현재의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초반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영선 행정관 고향 경북 경산 진량고등학교 출신이기에 경상북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영선 학력(대학)은 경기대학교 유도부 학사 출신입니다. 이후 이후 학군사관후보생(ROTC)으로 군대를 전역한 후에 석사과정을 밟았습니다. 

이영선 행정관은 2007년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일 때 경호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청와대 경호실로 배치됐습니다.


'이영선 행정관'은안봉근 전 비서관이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맡았을 때 경호실에서 파견돼 근무했는데. 이때 안 전 비서관이 직접 데리고 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고교 선후배 사이입니다.

'이영선 행정관'을청와대 '비선 진료' 의혹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인 이영선 행정관이 오늘 특검에 소환됩니다. 여러 차례 소환 요구에 응하지 않다가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자진 출석으로 급선회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생활을 챙기고, 최순실을 주변에서 보좌한 이영선 행정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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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소중지 뜻 -  특검 박근혜 대통령 시한부 기소중지 시사


시한부 , 조건부 기소중지는 박 대통령의 ‘불기소 특권’이 소멸될 때까지 시한부로 기소를 유보하는 조치다. 헌법 84조는 대통령이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소추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검 ‘朴 시한부 기소중지’  시사 특검 ‘朴 시한부 기소중지’ 시사


'기소중지'란 피의사건에 대해 피의자의 소재불명 등으로 수사를 종결할 수 없을 때 검사가 수사를 중지하는 처분이다.


기소중지란 피의사건에 대하여 공소조건이 구비되고 범죄의 객관적 혐의가 인정되는 경우에도 피의자의 소재가 판명되지 아니한 경우에 검사가 그 사유가 해소될 때까지 수사를 중지하는 처분을 말한다. 

기소중지 처분은 공범의 미검거, 중요참고인의 소재불명 등으로 인하여 피의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곤란한 경우에도 허용된다. 

피의사건에 대하여 공소조건이 구비되고 범죄의 객관적 혐의가 충분하더라도 피의자나 참고인의 소재불명 등의 사유로 수사를 종결할 수 없는 경우, 검사가 그 사유가 없어질 때까지 수사중지를 결정할 수 있다(검찰사건사무규칙 73조). 넓은 의미의 불기소처분에 해당하며, 기소중지결정으로 수사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피의자의 소재불명을 이유로 기소중지를 하는 경우에는 피의자를 지명수배하며, 기소중지의 사건기록에 공소시효 만료일을 기재한다. 또 기소중지가 결정된 사건에 대하여 수시로 그 중지사유가 없어졌는지의 여부를 검토하고, 피의자나 참고인의 소재가 파악되는 등 기소중지사유가 해소되면 다시 수사를 진행한다.



수사종결 형식 가운데 불기소처분(중간처리)의 하나로 검사가 피의자의 소재불명 등의 사유로 수사를 종결할 수 없는 경우에 그 사유가 해소될 때까지 수사를 중지하는 처분을 말한다. 기소중지는 잠정적인 수사종결이라는 점에서 협의의 불기소처분과 구별되며 수사의 종결이라기 보다는 수사의 중지처분에 해당된다.

'기소중지'는 피의자의 소재불명, 장기 해외체류 등으로 인하여 수사기관에의 출석 내지 조사가 언제 재개될

수 있을지 불분명한 때에 이뤄지는 처분인 반면, '시한부 기소중지'의 경우에는 형사조정 회부 등을 이유로

특정 기간 동안 수사의 진행을 정지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 시한을 정하여 일시적으로 조사를 중지하는 처

분으로서 양자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시한부 기소중지의 경우 예정된 시한이 만료하면 기소중지가 해제되고 다시 수사가 재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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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룡 변호사 프로필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 - 기피 신청

조원룡조원룡 변호사



자격 2009 변호사

학력 1999 - 2003 서울대학교 법학과 학사 졸업


조원룡 변호사 기피 신청 및 릴레이 마라톤 변론 중

'조원룡 변호사'는 강 재판관에게 기피 신청을 하는 등 무리한 변론을 이어갔다.


탄핵심판 헌재 16차 변론중에 강일원 재판관을 기피신청한 조원룡 변호사가 화재

기피신청 사유는 "상일원 재판관이 독선적이고 고압적인 재판 진행을 했다" 라는 것이었고, 기피신청은 15분만에 기각되었습니다. 

기피신청 각하 


인용시 7인 체제로 국회 측 "소송 지연 목적" 박근혜 대통령 측이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사건의 주심인 강일원 재판관에 대해 기피신청을 하였다.


대통령 측 '조원룡 변호사'는 22일 탄핵심판 16차 변론기일에서 "강 재판관이 소위 쟁점 정리라는 이름아래 국회가 준비서면이라는 불법적 방법으로 소추의결서를 변경하게 하고, 변경한 소추장으로 재판을 불공정하게 진행했다"고 이유를 발혔습니다



47살 늦깎이 사법연수원생 조원룡


서울대 운동권 학생이었던 형 덕택에 한국 해양대학교를 자퇴하고포장마차, 학습지 방문판매원, 음료수 배달원, 나이트클럽 종업원 등 험한 일을 전전했다. 거친 삶이었던 만큼 탈선 가능성도 높았지만, 그를 지켜준 건 공부에 대한 열망이었다.  


서울대를 졸업한 형의 명의를 빌려 학원 강사로 뛰면서 진짜 서울대생이 되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고 마침내 1999년, 서른아홉의 나이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여세를 몰아 공부에 맺힌 한을 풀 듯 사법시험을 준비했고다섯 번째 도전 만에, 당당히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자료출처

-http://www.nocutnews.co.kr/news/288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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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근(1966년 ~)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2부속비서관과 홍보비서관을 지낸 인물이다. 

안봉근 '문고리 3인방' 중 1인 프로필 ( 2월 20일 특검 출석 )


안봉근안봉근 문고리 3인방




출생일 1966년, 경북 경산시

직업         전직 공무원



- 대구대학교 중문학과 졸업

- 진량고등학교 졸업


경력

2015.01 ~ 2016.10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국정홍보비서관

2013.03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실 제2부속비서관

        제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



안봉근(1966년 ~)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2부속비서관과 홍보비서관을 지낸 인물이다. 

정호성·이재만과 함께 문고리 3인방으로 불렸다.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 증인이지만, ‘자녀에게 영향을 미쳐 사생활 침해 가능’이라는 근거를 들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고 불출석하였다.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이던 2012년 10월에는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열린 캠프 인사들의 기자회견에 나타나 막강한 위세를 보여주었다. 당시 의원실 5급 비서관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난스럽게 한 초선 의원을 향해 “의원님, 열심히 하고 있나요”라는 취지로 말을 걸었다. 당시 해당 의원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2012년 12월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2013년 2월 청와대에 비서관으로 들어갔다. 그 전까지 대통령 부인을 담당하던 제2부속실장의 직책을 맡았는데, 박근혜 정권은 영부인도 없는 제2부속실을 유지하면서 실제로는 최순실을 뒤치다꺼리하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2] 그렇게 제2부속실장의 직책을 맡은 후, 최순실이 검문도 없이 청와대를 무단으로 드나들게끔 편의를 봐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 경찰 인사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안봉근이 경무관급 이상 인사를 다 하고 있다는 현직 경찰관의 증언이 속속 나오고 있는 것. 

실제로 박근혜 당선 이후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을 거쳐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으로 일했던 조응천은 안봉근 비서관의 경찰 인사 전횡을 일찌감치 경고했던 바 있다. 2013년 10월쯤 청와대에 들어올 예정인 경찰관에 대해 검증을 하다가 '부담스럽다'는 판정을 내리자, 안봉근 비서관이 전화를 해 "이 일을 책임질 수 있느냐"고 조응천에게 따졌다는 것.[3] 그 후 한달 쯤 지나자 민정수석실 소속 경찰관 10여명을 한꺼번에 내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그 후임들은 다 단수로 찍어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그 배후에 안봉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안봉근에게 낙점된 몇몇 경찰 고위직은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정창배 치안감인데, 그는 2014년 청와대 치안비서관실에 총경으로 입성한 뒤 2015년 초 경무관으로 승진한 데 이어, 2016년 9월 지방청장급인 치안감으로 또다시 승진해 본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4]


그 외에 2015년부터 경찰 내 조정정년을 사실상 폐지시켜, 경찰 고위직에게 특혜를 준 데에도 안봉근이 개입했다고 한다. 조정정년이란 경찰공무원법이나 경찰 인사관리규정에는 없는 것으로, 후배들에게 승진의 길을 터주기 위해 정년을 앞당겨 옷을 벗는 관례를 말하는데, 이것이 없어지면서, 치안정감 이상 고위직 중 상당수는 물러나지 않았고 자리를 지키다 승진까지 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검찰 인사에도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실제로 검찰총장 인사를 앞둔 2015년 하반기에 안봉근은 정치권 지인을 만났는데, 총장 후보로 거론된 인물 중 한명인 김수남(당시 대검 차장)에 대하여 그 지인이 ‘김수남의 부친(고 김기택 영남대 총장)이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 이명박 진영을 도왔던 전력을 거론하면서 김수남은 어렵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얘기하자, 안봉근은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김수남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2014년 4월 ‘문고리 3인방’을 조사하던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을 쫓아낸 인물이라는 의혹도 있다. 당시 조 전 비서관과 함께 일했던 파견 경찰관 등 사정기관 요원 20명은 2014년 7월 1일자 팩스 한 장으로 모두 원대 복귀했다.


2014년 말 ‘최순실씨 전남편 정윤회 동향 문건’ 파동으로 문고리 3인방 사퇴 여론이 여권 내부에서도 비등했던 시기의 일화도 유명하다. 2014년 12월 7일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의 오찬이 있었는데, 당시 사퇴 요구에 휩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새누리당 의원들을 일일이 영접하며 귓속말까지 했다. 당시 참석한 한 새누리당 의원은 “안 전 비서관이 대통령 비서실장인 줄 알았다”며 비꼬았다. 

대통령 연설문과 문화체육관광부 정책자료 등 청와대 보고문건을 최순실에게 유출하는 데 관여한 혐의(공무상비밀누설죄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었다. # 11월 14일 10시경에 검찰에 출두하기로 했으나, 30분 일찍 기습 출두한 후 그냥 들어가버렸다. 그 전부터 검찰 인사에 개입해오면서, 검찰에 끈을 만들어둔 덕분이 아닐까 의심되고 있다. 정호성 이재만 의문의 1패 이날 검찰 조사 당시 최순실에 대해 “(박 대통령의 의원 시절 비서실장인) 정윤회씨의 부인으로만 알았다”고 허위 진술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보안손님으로 청와대를 출입했던 김영재의원의 존재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특검에서는 "너무 뻔뻔하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TV조선 보도에 따르면 검찰이 최순실과의 통화내역을 안봉근에게 보여주며 추궁했는데 "내 전화번호를 기억 못한다", "내가 이걸 썼는지도 기억 못한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한다.#


박근혜 탄핵 심판의 참고인으로 소환될 예정이었으나, 이재만과 더불어 소재 파악이 안되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 대리인단 측에서 2월 14일 증인 변론을 신청하며 그 날 안봉근을 출석시키겠다고 밝혔다. 경찰도 찾지못한 사람을 대통령 측이 소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 생긴다. 결국 2월 14일에도 헌재에 출석하지 않았으며 헌재는 직권으로 안봉근을 증인 취소하였다.


그리고 오늘 출석 ( 2월 20일 특검 출석 ). 그 결과는?


안봉근안봉근 박근혜




-자료참고출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1477996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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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호 변호사 - 박근혜 탄핵심판 대리인단 합류 (프로필)


장창호장창호 변호사


오늘(20일) 박근혜 대통령 측 대리인단인 이중환 변호사는 "정기승 전 대법관이 대리인단에 합류했다"고 밝혔다.

정기승 전 대법관과 장창호 변호사가 참여하게 되면서 박 대통령 측 대리인단은 18명으로 늘었다.


소속

법무법인세광 변호사


학력

- 경북고등학교 졸업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 사법연수원 수료(제7기)

경력


 

- 수원지검 검사

- 부산지검 검사

- 미국워싱톤 연방검찰청 방문검사 

- 대구지검 검사

- 국무총리직속 인권보호 특별위원회 전문위원실장

- 서울지검 검사 (고등검찰관)

-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위원

- 춘천지검 속초지청장

- 대구지검 공안부장검사

- 대구고검 검사 

- 의정부지검 형사부장검사

-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 의정부시, 고양시 법률고문

- 삼성화재보험 법률고문

- 연세대학교 정경대학 겸임교수


주요업무분야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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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전 국회의원 프로필 - 박근혜, 문재인


정두언전 국회의원, 정두언



정두언 1957년 3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학력

- 서울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3학년 재학중

- 국민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정책학 석사

- 경기고등학교

- 배문중학교

- 창서초등학교

정두언은 1957년 3월 6일에 서울에서 운전기사인 아버지와 공사장 잡일을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주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일제 시대 때 군수를 지냈고 아버지는 해방후 만주에서 귀국하여 사촌 형의 인연으로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의 아저씨뻘 되는 친척인 정성태는 먼 친척 동생이던 그의 아버지를 각별히 여겼는데 이때문에 그의 가족은 정성태 전 의원을 큰 아버지라고 불렀다. 정성태는 설산 장덕수의 권고로 한민당에 입당한 이래 민주당, 신민당에서 활약하였으며 64년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했다. 또한 1969년 8월 31일 광주에서 ‘3선 개헌반대 천리길 헌정수호행진’을 시작해 11일 동안 걸어서 서울에 진입하려다가 정사복 경찰중대에게 저지당하고 서울 삼청동 자택으로 이끌려갔다.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친척 형인 정성태 의원의 운전기사를 한 연줄로 일가가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창서국민학교와 배문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정두언은 청소년기에 가정이 불우한 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서대문 모래내 시장에 좌판을 펴서 5남매를 교육시켰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자기애 또는 자존심을 들어냈다."며 자신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고백하기도 했다.


1973년에 경기고에 진학하였다. 중학교 때부터 그는 팝송을 많이 불렀는데 화장실에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노래를 불렀다 전해지나 가수의 꿈을 접고 서울대 무역학과에 진학하였다. 서울대 재학 시절 록밴드를 결성했다. 보컬그룹명은 'spirit of 1999'였는데 세기말을 염두에 둔 작명이었다. 정두언은 학과에서 스타급이었다. 술자리나 회식 또는 연수회를 가면 언제나 사회를 맡았고 분위기를 주도하였다.[3]


그 뒤 진로를 고민하며 도서관에서 생활하던 중 대학 졸업을 앞두고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 당초 고시 성적이 우수했지만 실습점수가 0점이었다. 구청 인사 담당자와 시비가 붙자 해당 관계자가 악심을 품고 영점 처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다른 인사 담당자가 그를 합격시켰다. 그 뒤 행정고시와 사법시험 합격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인 장교 복무 대신 사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강원도 양구의 부대에서 복무하고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그 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 사무관시보에 임용되었다.

관료 생활


그 뒤 행정 사무관시보로 임관 후 정무제2장관실에 배속되었다. 당시 노태우 정무제2장관을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년 간 정무장관실,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등을 거쳤다.


노태우가 정무제2장관에서 문화체육부장관으로 발령나자 그를 따라 문화체육부에 배속되어 올림픽 개최 지원업무를 담당하였다. 1985년 1월에는 국무총리실로 발령, 청소년대책반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 뒤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으로 있을 때 상사의 순직을 보기도 했다. 1987년 4월에는 4.13 호헌 결사 반대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 해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KBS 방송의 드라마급 주연을 뽑는 KBS 탤런트 공채에 했던 그는 4단계 최종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로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1991년 미국으로 특별 유학, 2년 간의 연수를 받았으며 이 기간 중 조지타운 대학에도 다니면서 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겨 국무총리실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 등을 지내고 2000년에 정계에 입문하라는 이회창의 권고로 정계 입문을 결심, 사직서를 제출, 의원면직하였다. 그러나 2000년 선거에서는 낙선하고 말았다.


정계 입문

정계 입문 초기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2000년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했다가 장재식 후보에게 2000표 차이로 떨어졌다. 이 때의 참패로 그는 우울증을 겪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우울증 치료를 받고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2개월간 병상에 입원했던 그에게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는데 국회의원 이명박이었다.


당시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 중이던 이명박은 정두언에게 정중히 캠프 합류를 권했다. 그렇게 그는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자 캠프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이명박은 그에게 "공직생활 20년을 채워 연금을 타도록 해주겠다"며 정 의원을 영입했다.그는 '이명박의 컨셉이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서울시장 출마를 거의 혼자 준비했다.'는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고 이명박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서울시 부시장


민선 3기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당선으로 서울시 정무 부시장이 되었다.


2003년 서울특별시 프로축구단 추진위원장[5] 에 위촉되었다. 2004년 서대문(을)구에서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01년 그는 공무원 생활의 경험을 근거로 총리 등 행정부 고위 관료의 부끄러운 실태를 공개하고 비평한 책인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를 발표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치 활동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명박후보 캠프의 선대위 기획본부장과 전략기획 총괄팀장으로 활동하며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자 캠프에서 선거 전략을 담당하였으며, 2007년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17대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이 되었다.


2008년 18대 총선에 재선한다. 2010년 7․14 전당대회에서 지도부에 입성, 최고위원으로서 중도개혁과 보수혁신의 길을 주장하였고,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2001년 출판된 저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는 비효율적인 행정 행태를 비평했으며, 2011년에는 《한국의 보수, 비탈에 서다》라는 또 다른 저서를 출간하였다.또한 가수로 4집 앨범까지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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