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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리스트


운동 개요


누구나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다. 달리기의 경기 종목으로서는 단거리달리기, 중거리달리기, 장거리달리기, 마라톤 등이 있다. 걷기나 조깅과 달리 경쟁적인 운동으로 운동 강도가 높기 때문에 체력이 좋거나 달리기에 익숙한 사람이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달리기는 심장, 폐, 근육 등에 자극을 많이 주므로 운동효과를 증가시켜 운동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운동 순서


1. 몸이 지면과 가급적 수직을 유지해야 중력을 덜 받아 좀 더 편안하게 달릴 수 있다.

2. 발바닥은 뒤꿈치가 먼저 닿고, 중심이 앞으로 이동하면서 발바닥 전체가 골고루 지면과 닿게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

3. 허리는 꼿꼿이 세우고, 가슴은 쫙 펴고, 엉덩이는 앞으로 당겨준다는 기분이 들도록 자세를 취한다.

4. 어깨의 힘을 빼고 팔은 자연스럽게 내린 상태에서 팔의 각도가 90°가 되도록 굽히고, 달걀을 가볍게 잡은 기분으로 살짝 주먹을 쥔다.

5. 달릴 때는 L자 모양이 된 팔을 자연스럽게 앞뒤로 움직인다.

6. 시선은 전방을 바라본다.



달리기의 효과

· 규칙적인 호흡으로 인해 폐활량이 증가하고 폐기능이 향상된다.
· 심장기능이 좋아지고 혈액량이 증가한다.
· 비만, 당뇨, 고혈압 등 성인병 예방에도 좋다.
· 체중부하 운동이므로 근육량과 골량을 증가시켜 골다공증 예방에 효과가 있다.
· 엔도르핀의 증가로 인해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 신체 모든 기관을 활성화시키고 강화시켜 궁극적으로 노화를 예방하거나 지연시킨다.

달리기의 종류

일반적으로 시속 6.5km까지는 걷기라고 하며, 8.0km/h까지는 조깅, 그 이상을 러닝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달리기는 건강이나 체력단련을 위해 천천히 달리는 조깅, 천천히 오래 달리는 장거리 조깅, 먼 거리를 천천히 오래 달리는 LSD(long slow distance), 그리고 경쟁적으로 빨리 달리는 단거리 달리기, 중거리 달리기, 초장거리 달리기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적정 운동 강도


운동 강도는 자신의 체력수준에 맞게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라면 걷기를 어느 정도 한 다음에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안전하다. 걷기는 체중의 1.5배에 달하는 무게가 발에 실리는 데 반해, 달리기는 무려 3배에 달하므로 부상을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알맞은 운동 강도는 옆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의 느낌으로 여유심박수(HRR, heart rate reserve)의 40~80%의 운동 강도가 적당하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운동할 경우 신체의 충격으로 인해 발목과 무릎, 허리에 상해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약한 강도에서 높은 강도로 서서히 높여 나간다. 


운동시간은 처음에는 걷기와 달리기를 5분씩 반복하며 몸을 적응시킨 후에는 20분, 나중에는 30~40분 정도까지 차츰 달리기 시간을 늘려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빈도는 주 3~4회 이상 실시해야 유산소 운동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주의사항

- 반드시 준비운동과 정리운동을 실시한다. 
- 쿠션이 있는 운동화를 착용한다. 
- 자신의 체력에 맞는 운동 강도로 달리도록 한다.

주의 및 참고 사항

· 충분한 준비운동을 통하여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고, 심장이나 관절의 움직임과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도록 한다.
· 운동이 끝난 후에는 반드시 정리운동을 한다.
· 무리하지 않게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
· 운동 중에 메스껍거나 식은땀이 흐르면서 어지럽고 호흡이 가쁜 증상이 있으면 즉시 운동을 중단하도록 한다.
· 낡은 신발을 신고 달리지 말고 달리기에 적합한 운동화를 착용해야 한다.
· 기온이 영하 7℃ 이하이거나 바람이 심한 경우에는 운동을 쉬거나 실내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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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네이버대백과 사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기념일.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의 의미. <x-MAS>라고 쓰는 경우는 X는 그리스어의 그리스도(크리스토스) XPIΣTOΣ의 첫 글자를 이용한 방법이다. 프랑스에서는 노엘(Noël), 이탈리아에서는 나탈레(Natale),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텐(Weihnachten)이라고 한다. 또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데이>, 그 전야를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한다.



『신약성서』에는 마리아의 처녀 회임으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 교도는 1월 1일, 1월 6일, 3월 27일 등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였는데, 교회로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는 않았다. 3세기의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크리스마스를 정하는 것은 이교적이라고 비난하였다.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로 고정되고, 본격적으로 축하하게 된 것은 교황 율리우스 1세(재위 337~352)때이며, 동세기 말에는 그리스도교 국가 전체에서 이날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게 되었다. 오랜 논의끝에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로 고정된 것은 초기 교회 교부들의 체험과 영지에 의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에 큰 축제를 행하는 것은 고대 시대의 사회의 습관이었다. 그중에서도 요람기의 그리스도 교회가 개종을 원하였던 로마인이나 게르만인 사이에는 동지 제사가 성대하게 행하여졌는데 창고에는 수확된 곡물이 가득 차 있다. 목초가 부족한 겨울을 대비해서 도살한 가축의 고기도 충분히 저장되어 있다. 1년의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이 시기, 사람들은 이어서 찾아올 식량부족을 잊고, 먹고 마시는 성대한 축제를 행하였다. 생명의 은혜를 준 태양의 힘을 약화시키고, 겨울을 가져올 자연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공물을 바치고, 풍작ㆍ풍요를 기원해서 불을 피웠다. 온 세상의 초목이 메마를 때 푸르름을 유지하는 상록수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서 장식되었다.


게르만인의 동지의 축제 율에 대해서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로마인의 동지의 축제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문학ㆍ회화ㆍ조각 등에 남아 있는데 12월 25일은 로마의 동지로 그날은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으로서 3~4세기의 로마에 보급된 미트라스교의 중요한 제일이었다.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는 사투르날리아라고 불리는 농경신 사투르누스의 제사가 행하여졌다. 이 기간에는 집집마다 밝게 불이 켜지고, 상록수가 장식되었으며 선물이 교환되고 남자들은 여자의 의복이나 동물가죽 등을 두르고, 보통은 금지되어 있던 행위가 행하여졌는데 주인과 노예가 자리를 교환하는 소동도 행하여졌다.


이와 같은 로마의 사투르날리아와 게르만의 율 축제의 시기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로서 선택되었다. 교회는 기존의 제일을 가능한 한 이용할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트라스교는 그리스도교의 강적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보다 앞서 유사점이 많은 미트라스교와의 습합을 고려, 321년에는 매주 휴일을 <태양의 날(dies solis=sun day)>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크리스마스에 대해서도 교회의 동일한 방침을 볼 수 있다. 그위에 당시 그리스도 교도 사이에도 예수를 이 세상의 빛, 태양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우리 주 예수가 탄생한 이 성스러운 날을 "태양의 탄생일"이라고 부르자>라고 하였는데 크리스마스가 언제부터 축하되었는지는 불명하다.


초기 동방교회의 사람들은 공현제를 그리스도 세례의 날, 신성 현시의 날로서 축하하였다. 그들은 아리우스파 사람들로, 예수의 세례를 중시하고, 탄생에는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탄생 때부터 예수의 신성을 믿는 정통파 그리스도 교도는 그들을 이단으로 생각했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의 이단선고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서방교회가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정한 것은 이단과의 구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로마에서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에 축하된 것은 336년 이전이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데 이 날이 결정되기까지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즉, 12월 말, 예수가 태어난 팔레스타인 지방은 우기에 해당하며, 양은 들로 나가지 못한다.


이 시기에 인구 조사가 행하여졌다는 증거는 없다. 학자들은 별도의 근거에서 크리스마스를 추정하려고 하였는데, 어떤 견해도 충분히 설득적이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크리스마스는 고정되었다. 수세기동안 이교의 습관은 강하게 남아 있으며, 교회는 이를 염려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교의와 명확히 모순되지 않는 한 이를 근절하지 않고, 동화ㆍ습합의 방침을 취했다. 다음에 영국을 예로서 오늘날에 이르는 크리스마스의 변천을 조감해보자.


중세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영국 전도를 개시했을 때, 크리스마스는 로마교회의 3대 축일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이듬해 크리스마스에 1만명 이상의 앵글로 색슨인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약 1세기 후, 베다는 이 날이 원래 <어머니들의 밤>이라고 불리며, 어머니인 여신의 축일이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개종해도 관대한 교회의 자비에 의해서 죄없는 이교의 축제를 즐겼던 것이다. 그들은 상록수로 장식하고 율의 통나무를 태우고, 가면극이나 주술적인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이와 같이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율과 탄생절의 습합으로서 성립하고, 앵글로 색슨력은 이날부터 신년을 기산하게 되었다. 이런 관습은 중세 말까지 남아 있었다. 알프레드 대왕은 크리스마스에서 공현제까지를 성스러운 기간으로 정하고, 노동을 금하였는데 왕이 878년 데인에게 일시적으로 패배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위의 기간이 성스러운 기간으로 정해진 것은 567년의 투르(Tours) 공의회에서이다. 앵글로 색슨인의 그리스도교화는 데인인의 침략에 의해서 지체하거나 후퇴하였는데, <노르망 콘퀘스트>까지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크리스마스>라는 용어는 『앵글로 색슨 연대기』의 1043년의 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전에는 <동지제> 또는 탄생을 의미하는 <nativity>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에도 크리스마스는 잉글랜드 교회의 3대축일의 하나로서 축하되었다. 당시의 문학작품 등에 의하면 크리스마스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시간, 진정한 기쁨의 시간, 친구ㆍ친척과 정을 돈독히 하고, 가난한 이웃을 환대하는 시간이었다. 이 시대는 궁정생활의 화려함에 비해서 지방에서는 빈부의 차가 심화되어 과거의 인간관계가 붕괴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크리스마스는 가난한 이웃을 환대하라는 문구가 저술가들에게 특히 강조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는 고향사람들을 환대하도록 크리스마스에는 신하들을 귀성시켰다. 지방자치체는 귀족ㆍ젠틀리에게 이 환대를 의무지웠는데 특히 흉작일 때는 그것이 지방의 치안유지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1627년의 크리스마스에 추밀원은 런던 주교에게 영국에 망명해온 프랑스의 신교도 구제를 위해서 주교구 전체에서 기부금을 모으도록 명령하고, 크리스마스 정신을 간청했다.


퓨리탄 혁명시대


왕당파와 영국 교회는 즐거운 전통적 습관을 상징하는 날로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그러나 근엄한 퓨리탄은 이 날을 로마 가톨릭의 축일로서 비난하고, 폭음폭식, 댄스, 도박, 대소동 등 악으로 연결되는 축제로서 공격했다. 이미 『제약의 해부』(1583)의 저자 P. 스터브스는 극장ㆍ연극을 비방하고, 가면극을 가장해서 도둑, 매음, 살인 등이 크리스마스처럼 횡행하는 시기는 없다고 기술하였다. 17세기의 어느 퓨리탄은 <크리스마스는 주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바쿠스신의 축제이다. 이교도는 이를 보고 예수는 탐식한 향락주의자, 음주가, 악마의 친구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다. 온건파는 지나친 행동을 시정하는데 그쳤다. 장기의회도 크리스마스에 간섭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1644년,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교회의 압력에 의해서 태도결정이 강요되었다. 장로파는 1583년, 스코틀랜드에서 크리스마스를 완전히 금지하였다. 그후 왕의 명령으로 한때 부활하였지만, 다시 크리스마스를 금지하였다. 의회파의 지도자들은 장로파의 크리스마스 금지요구를 잉글랜드에서 실시할 것을 거부하였지만 곧 굴복하였는데 그것은 의회파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만 효과를 거두었다. 1647년, 의회파는 크리스마스 금지법안을 가결하고자 하였다. 이때 이에 반대하는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나 마침내 가정에서의 크리스마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정복고(1660) 이후


크리스마스는 다시 교회의 3대 축일의 하나가 되고, 사람들은 이를 자유롭게 축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상의 변화는 과거에 시골의 지주저택에서 확산된 전통적 크리스마스의 모양을 바꾸어서, 소박한 사람들의 소동도 폐지하고, 종교심도 희박해지게 되었다. 이 변화는 천천히, 불균등하게 진행하였다. 크리스마스 휴일이 제정되고, 대학, 학교, 재판소, 의회는 크리스마스에서 공현제까지를 휴일로 하고, 관공청은 이 기간의 일수를, 다망한 부서는 그 일부를 휴일로 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성촉제(2월 2일)까지를 크리스마스로 생각했다. 19세기에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노동조건이 매우 가혹해져 크리스마스 휴일은 당일만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부유한 가정에서는 화려하게 축하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이를 축하할 비용이 없는 사람들이 증대하여, 크리스마스는 결국 사멸할 것으로 보였다.


빅토리아 시대


19세기 중엽, 크리스마스가 부활하였다. 그것은 처치스트운동의 시대로, 대영제국의 위광이 가장 확대된 시기였다. 새로운 크리스마스에서는 이웃사랑, 자선이 중시되고, 종교심의 부활에 의한 종교적 측면의 보정이 행하여지고, 그 위에 과거의 화려한 축제의 관습이 빛을 더했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축제가 된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크리스마스 트리,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 카드가 도입되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부활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크리스마스 정찬(디너)이 서민 가정에 진출하였는데 오늘날의 크리스마스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새로운 크리스마스의 성립에 크게 기여한 것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과 C. 디킨스이다.



앨버트 공은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습관을 윈저 성의 가정 크리스마스에 도입하고,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몇 가지 문학작품을 공간하여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전하고, 동시에 크리스마스의 존재모습, 물질적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해서 수행해야 할 자선 등의 의무를 가르쳤다.


새로운 크리스마스는 급속히 침투하여, 공론가나 반대론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비국교도도 어린이들이 친구들의 즐거움의 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예배당의 일부는 회원이 국교회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것을 보고 크리스마스 예배를 개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비국교도의 태도도 연화하여, 영국국민이 새로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 의해서 단축된 크리스마스 휴일도 복싱 데이(Boxing Day, 크리스마스의 다음날로 이 날에 사용인이나 우편배달부 등에게 축하 선물을 준다)까지 연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은행, 관청만이 아니라 19세기 말까지는 일반 상공업 종사자에게도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모두가 함께 축하하는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성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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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저축은 목돈을 만들 때 까지만 해라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로부터 여러 가지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말들에 은영 중 세뇌되어 살아간다. 나는 어릴때 국산품을 사용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와서 느낀것은 내가 국산품을 사용하는 것과 내가 부자가 될 가능성과는 전혀 무관하였고 정작 부자가 되는 것은 그 국산품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전혀 몰랐고 내가 굶어 죽어도 그들에게 나는 언제나 타인이었다.


은행에 저축을 하여야 개인도 잘 살고 국가도 부강하여진다는 것 역시 우리에게 그렇게 세뇌되어 있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언젠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내게 "학교 숙제인데 집에 있는 은행 통장의 종류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 저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내 준 숙제였다. 내가 보통예금통장 두개 뿐이라고 하였더니 아이는, "우리 집은 목돈마련도 없고 정기 예금도 없느냐"고 이상한 듯 물었다. 사실 나에게 은행은 생활비를 잠시 맡기거나 자동이체를 위한 곳에 불과하다.


70년대 초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부잣집 친구들의 아버지는 은행 고위층 사람이거나(아마도 그 중 상당수는 대출 커미션을 받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돈을 빌려 사업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은행에 저축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나는 내가 저축을 한 돈을 갖고 다른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싫었고 지금도 싫어한다. 처음부터 나는 은행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말이다.


20대에 내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천만원은 아줌마들과 함께 한 낙찰계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계는 위험하므로 정말 믿을만한 계가 아니라면 꼬박꼬박 은행에 저축 할 것을 권유한다. 단 목돈을 만들 때까지 만이다. 목돈을 오백만원이라도 만들면 그 돈은 수익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한품이라도 이자를 더 많이 주는 곳을 찾아 다니라는 말이다.


은행에 저금을 많이 하여 저축상을 받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나는 그 많은 돈을 왜 은행에 계속 넣어둘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원금이 보호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종금사나 신용금고, 조합 등과 같은 제 2금융권에 분산시켜 놓고 이자는 매월 은행으로 자동이체 시키면 어떨까? 그런 곳은 불안하고 찾아 다니기도 불편하고 시간이 소요된다고? 뭐라 불안하다는 말인가? 원금이 날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다면 5천만원 원금이 보장되는 한도 내에서 하면 될 것 아닌가. 그래도 돈을 맡긴 곳이 문을 닫으면 몇 개월간 그 돈을 찾지 못하지 않느냐고? 그럴 수 있다. 몇 개월 이자를 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봤자 몇 %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도는 날릴 각오를 하고 나는 언제나 고금리만 따라 다닌다. 하지만 원칙이 있다. 법으로 보장이 되는 한도 금액으로 여러곳에 쪼개 놓는다는 것과 이자는 매월 자동 이체로 수령 한다는 것, 갑자기 돈이 필요하게 될 때를 대비하여 일정액은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곳에 예치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나의 좁은 생각인지는 몰라도 어느 나라에서든지 은행들이 부실해지면 정부에서 쓰는 수법이 예금 보장 한도액 제도인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비 맞은 참새처럼 불안감에 떨면서 자금을 제2금융권 보다는 그래도 더 안전하게 보이는 은행으로 옮기게 되고 은행들은 CIS 비율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맞추게 되어 안정화 단계로 들어가기 쉽다.

결국 불안감 조성은 은행을 살리기 위한 심리적 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즉 다 름 금융 기관들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안정성을 담보로 하여 전략적으로 이자는 조금 줌으로 서 예매 마진을 극대화 시켜 그 마진으로 부실을 털어내려는 속셈일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투신사나 은행 중 자기넥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광고하는 곳은 이자를 자장 조금 주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은행은 길 건너 가까이 있는데 제2금융권 회사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간도 걸리고 불편하다고? 도대체 장신 시간이 다른 일들에 얼마나 값지게 쓰이고 있기에 시간이 걸린다고 시간을 아까워하는가? 시간은 금이지만 부자가 아니라면 시간이 금이 아닐 경우가 많다. 불편하다고? 편리함은 언제나 당신의 돈을 빼앗아가는 원흉이다. 금융기관과 거래할 때 만큼은 불편함을 감수해라. 당신이 불편함을 느낄수록 돈은 쌓이기 마련이며 돈 찾기가 편리할수록 돈은 새가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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