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명언, 한비자 말을 인용한 이정미 퇴임사 - 한비자 명언 모음은 제일 하단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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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기원전 약 280∼233년)의 이름은 한비이고 전국 말기 한(韓) 출신이다. 원래는 한나라의 공자로 순자(荀子)에게 배운 중국 고대의 이름난 사상가이자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원전 234년은 진왕 정(훗날의 진시황) 13년으로 진나라가 군사를 동원해 한나라를 공격해왔다. 이 해 진왕 정이 한을 공격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오랫동안 천하통일에 힘을 쏟아온 진은 6국을 제거할 결심을 하고 6국 중에 가장 약한 한나라를 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 진왕 정은 6국을 소멸시키는 자신의 숙원을 위해 인재를 적극적으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런 진왕 정이 언젠가 한비자의 저술인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읽고는 깜짝 놀라며 이 책을 쓴 사람은 틀림없이 기재일 것이며 자신의 통일대업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사(李斯)에게 감탄을 연발하며 "이 사람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사는 "이것은 한비자란 자가 쓴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진왕 정은 한비자를 얻기 위해 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한비자를 지명하며 진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고, 한왕은 진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냈다.
한비자와 이사는 사실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한비자는 말을 더듬고 말도 잘 꾸미지 못했다. 하지만 재주와 생각이 남다르고 글을 잘 썼다. 이사는 이런 한비자에 열등의식을 느끼며 자책했다. 『한비자』는 군왕들이 보라고 쓴 책이다. 한비자는 유가 학설에 반대하면서 군주의 권술(權術)에 대해 대서특필하여 훗날 군주가 전제독재로 신하를 통제하는 데 이론과 방법을 제공했다.
한비자는 한나라가 갈수록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걱정이 되어 여러 차례 한왕에게 부국강병의 모략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한왕이 씩씩하게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팠다. 또 권력을 가지고도 신하들을 제대로 통제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재능 있는 인재를 기용하여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한나라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로 허영과 사치에 빠져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갈 인물들을 등용하고 있었고, 이 자들의 지위가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들보다 더 높았다. 이에 울분을 품고 『고분』, 『오두』, 『내외저(內外儲)』, 『설림(說林)』, 『세난(說難)』 등 십만여 자에 이르는 저작을 써서 역사상 득실의 변화를 종합했다.
한왕은 당초 한비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자 비로소 한비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자청하게 했다. 진은 한비자를 억류시킨 다음 단숨에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왕 안(安)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법·술·세를 함께 구사하라
개인적 원한을 공적인 일에 개입시키지 말라
저주받은 '비기'를 남긴 말더듬이 한비자, 그는 인성의 약점과 욕망을 끔찍하리만큼 아프게 지적한 칼날같이 예리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 무서운 지성으로 법가 사상을 집대성했고, 그것은 통치술과 제왕학으로 표출되었다.
한비자, 영광과 비극을 한 몸에 지녔던 이 학자는 법가학파의 종합판이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이런 것이었다. 군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녀야 하며 인민들의 감사를 바랄 필요가 없다. 또한 인민의 원망에도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상벌이 엄격하고 분명하면 정부를 만능으로 만들 수 있다.
한비자가 죽은 뒤 그를 숭배하는 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하나의 책으로 정리하여 『한비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비자를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던 진시황과 동문수학한 이사는 한비를 죽였지만 그의 사상은 고스란히 접수하여 날로 커져가는 그들의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한껏 활용했다.
제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킨 한비자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때문에 숱한 오해와 공격의 표적이 되었지만 그만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제왕학과 정치사상을 제시한 인물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권력관계와 그를 둘러싼 투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틀'로서 인성(人性)이란 문제를 제기했던 한비자는 존재 자체로 충격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간파한 다음 이를 제왕학(통치학)의 권술(權術)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권력론-권술론-제왕학이 그에 이르러 하나로 결합되어 가장 실감나는 이론체계로 확립되었다. 그의 이론은 깨어 있는 시대의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적용한 결과물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비극적인 최후를 면키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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